중국이 주도하는 첫 국제금융기구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영국에 이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도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참여국 수가 30개국을 넘어섰다.
AIIB 설립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일본이 공동 최다출자국(15.6%)이 되어 만든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이끌어온 국제금융 질서를 변화시킬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AIIB 같은 대규모 국제개발은행이 설립되는 것은 소련의 붕괴 직후인 1991년 동유럽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이후 처음이기도 하다.
외신들은 “AIIB 출범은 아시아 지역 내 경제기구 하나가 출범하는 차원이 아니라 향후 이 지역 경제 및 무역 질서를 미국과 중국 중 누가 끌고 갈 것인가 하는 기 싸움을 보여주는 첫 시험대”라고 분석하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7일자에서 “중국의 돈 자석이 미국 우방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면서 “AIIB 출범은 21세기 미중 권력 이동의 신호탄”이라고 못 박았다.
실제로 중국은 한껏 고무되어 있다. 관영 환추(環球)시보는 18일자 사설에서 “영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입장을 바꾼 것은 중국의 굴기(부상)를 억제하려는 미국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AIIB 경쟁에서 미국을 이겼다”고 노골적으로 승전고를 울렸다.
미국은 공개적으로 중국 견제에 나서면서도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역력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하는 ‘아시아 중시 정책’에 직격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은 17일 하원 재무위원회 청문회에서 “AIIB 설립 취지는 인정하지만 AIIB가 ‘높은 수준의 글로벌 표준’에 부합할 수 있을지는 잘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IIB가 미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구만큼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추기 어렵다는 것이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도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AIIB 등) 어떤 새로운 다자기구라도 높은 수준의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내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 주도의 AIIB 설립은 이제 막기 어려운 추세인 만큼 AIIB 설립을 마냥 반대하기보단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설립되도록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영 전문지 포브스는 ‘지금 워싱턴이 해야 할 일’이란 16일 칼럼에서 “지금 워싱턴에는 ①계속 다른 나라에 가입하지 말라고 할 것인가 ②미국도 가입할 것인가 ③그냥 놔둘 것인가 하는 세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는데 ①, ③은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고 미국에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차라리 미국도 가입해서 그 안에서 역할을 하는 것이 낫다”고 주문했다.
중국이 자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구 설립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실물 부문 경쟁력만으로는 미국 주도의 금융질서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면서 얻은 자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도 바탕이 됐다.
AIIB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10월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때 처음으로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지난해 10월 베이징에서 공식 출범이 선언됐다. 초기 자본금 500억 달러로 시작하고 사무국은 베이징에 두며 올해 말 안에 가동시킨다는 계획이다. 자금은 주로 아시아 지역의 사회간접자본(도로, 항만 등 인프라)에 집중 투자된다.
미국이 설립에 반대를 표해 온 이유는 중국의 성장 전략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최대 지분을 갖고 출범하는 AIIB를 통해 동남아와 서남아 저개발국에 철도, 공항 건설자금 등을 지원하면 자연스레 중국의 입김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까지 아시아 지역에 필요한 인프라 투자 규모가 무려 2900억 달러에 달해 중국의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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