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전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가 지금 한일 양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부산에 이어 서울에서도 상영 움직임이 있고 도쿄에서는 내가 속한 일본국제교류센터가 기획하고 있다. 6월 중순 제주도에서 열리는 국교정상화 50주년기념 학술대회에서 한일 유명 학자들이 감상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조선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요청에 응해 17세기 초 시작된 조선 왕조의 대규모 사절단으로 200년 사이에 12번이나 일본에 보내졌다. 유명 학자와 문화인, 예능인 등도 대거 참여한 가운데 부산에서 쓰시마(對馬)를 거쳐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수개월에 걸친 왕복 행렬은 각지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으로 붕괴된 양국 관계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교류를 낳는 등 그 의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영화를 만든 사람은 재일연구자였던 고 신기수 씨다. 일본 각지의 통신사 발자취를 찾아 귀중한 유물들과 통신사 행렬을 그린 그림들을 모아 필름에 담았다. 거의 잊혀져 있던 한일 교류의 역사를 현대에 되살린 명작이었다.
지금 이게 각광받는 이유는 국교정상화 50년에 즈음해 조선통신사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하자는 한일 공동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국 외교 관계가 껄끄러운 가운데 밝은 소재로 지켜보고 싶다.
통신사는 당시 쓰시마 번(藩)이 에도 막부와 조선 왕조를 중개해 시작된 것이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연출된 터무니없는 공작에 흥미가 당긴다. 한일 연구자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 쪽은 이에야스였지만 조선 왕조는 이에 응하는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침략을 사죄하고 사절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낼 것을 이에야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린 이에야스는 조선 침략에 관계없다는 입장이어서 이에 응할 가능성은 없었다. 중간에서 곤란해진 쓰시마 번은 계략을 궁리해 조선이 바라는 대로의 국서를 위조해 보냈다.
빠른 대응에 놀란 조선 왕조는 국서 형식 등을 미심쩍게 생각해 위조가 아닐까 의심했다. 이 때문에 내부에서 상당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사절 파견을 결단했다. 일본과의 사이에 평화를 되찾아 많은 포로를 빨리 찾아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1607년에 실현된 첫 통신사는 국왕의 국서를 답장으로 지참했는데 이를 이에야스가 받으면 처음의 국서 위조가 들통난다. 이에 통신사와 동행한 쓰시마 번의 가신이 이 답서를 이에야스의 의심을 사지 않는 가짜 국서로 바꿔치기 해버렸다. 여기에는 속사정을 이해하는 조선 측 인물이 얽혀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해 양국간 평화로운 시대가 막을 열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지나 국서 위조가 도쿠가와 정권에 들통나버렸다. 쓰시마 번을 배신한 중신이 내부 고발한 것이다. 당시 번주는 에도에 불려가 선대 번주에게 제기된 의혹을 추궁당하고 ‘멸문’의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이에야스의 손자)는 번주의 책임을 묻지 않고 고발한 중신을 유배했다. 이렇게 해 쓰시마 번이 중개하는 조선과의 교류는 그대로 이어져 통신사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참으로 드라마 같은 전개다.
왜 이런 일이 통했을까. 양국 무역으로 재정을 유지해 온 쓰시마 번에게 양국 우호 관계는 스스로의 사활 문제이며 국서 위조는 목숨을 건 승부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를 외교문제로 삼지 않은 양국 정권도 뛰어난 판단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약 400년. 대통령과 총리의 발언이 실시간으로 상대에게 전해지는 오늘날 이런 외교는 통할 리도 없다. 그렇다고 상대 언동의 결함에만 눈을 돌리는 풍조는 과연 바람직할까. 정보의 위조는 논외이지만 약간씩은 상대의 좋은 부분과 개선점에 눈을 돌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하는 것만이 외교는 아니다. 큰 국익을 위해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상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 선인들의 지혜에는 현대 외교가 참고해야 할 가르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