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의 취재노트]퇴장당한 하시모토의 ‘극장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9일 03시 00분


도쿄=박형준
도쿄=박형준
“나 같은 정치인이 오래하는 세상은 위험하다. ‘원 포인트 릴리프(한 타자만 상대하는 구원투수)’로 충분하다. 적을 만드는 정치가가 계속 있는 것은 세상에 해롭다. 그게 건전한 민주주의다.”

한때 총리 후보감으로 기대를 모았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45) 일본 오사카(大阪) 시장의 정계 은퇴 선언을 듣는 일본인들은 갸우뚱했다. 누구보다도 남을 헐뜯으며 독설을 날려 온 그가 스스로를 ‘퇴출 정치인’이라 낙인찍으며 자신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하면 세상에 해롭다고까지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사카 시와 부를 합치겠다는 행정구역 재편안이 17일 부결되자 “부결되면 정계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대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촉망받던 한 젊은 정치가의 퇴장을 보는 일본 언론들은 ‘극장 정치(화려한 연기를 하는 듯한 정치)’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하시모토는 일본에서 극장 정치의 대표 정치인으로 통했다.

하시모토는 와세다(早稻田)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7년부터 변호사를 했다. 잘생긴 얼굴에 달변이어서 많게는 주 9회 버라이어티쇼 등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거액을 벌어들이는 ‘탤런트형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38세 때인 2008년 1월 도쿄(東京) 다음 가는 대규모 광역지자체인 오사카 부(府) 지사에 선출됐다. 정치가로서 그는 독설을 수시로 던지며 싸움닭과 같은 삶을 살았다. 오사카 공무원들에게 내놓은 첫 일성이 “여러분은 파산 회사의 종업원들이다”였다. 2011년 정치자금 모금 파티에선 “지금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독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은 공개 토론을 벌여 제압하기도 했다.

상당수 정치인과 공무원이 그에게 등을 돌렸지만 오사카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가 2010년 만든 지역 정당인 오사카유신회는 2012년 일본유신회로 이름을 바꿔 달고 전국 정당으로 몸집을 키웠다. 현재 유신당으로 이름을 바꾼 일본유신회는 의원 51명이 소속된 제2 야당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달변인 그의 발언은 때론 상식을 벗어났고, 그 발언들이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 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 있다면 한국이 내놓았으면 좋겠다”(2012년 8월)고 한 망언은 한국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쟁터에서 위안부 제도는 필요했다”(2013년 5월)고까지 말해 미국 등 해외뿐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도 강한 반발에 부닥쳤다. 그 후 지지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독설과 막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 상식을 넘어서는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들이 한국에도 많다. 하지만 정치는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라는 것을 하시모토는 보여주었다. 탤런트 정치인들의 퇴장이 남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하시모토#극장#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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