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 한일 갈등, 원인과 해법을 묻다
과거 수준의 회복은 불가능…달라진 구조적 환경 수용해
새로운 관계 정립이 현실적
그나마 안정적 관리 위해선 도쿄-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탈국가, 탈정치, 탈중앙이 필요
“한국과 일본이 왜 굳이 잘 지내야 하느냐.”
이 질문을 요즘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종종 듣는다. 엉뚱하기도 하고, 원론적이기도 한 이런 질문은 받으면 전문가들도 일순 당황한다. 당위로서 원만한 한일관계를 상정하고 갈등분석과 대응방안만을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계가 내놓는 자료에는 가끔 이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지만, 한국 쪽이 내는 논문이나 자료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다.
22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산업혁명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둘러싼 한일 당국자 회담은 결렬됐다. 그러나 다음 날 도쿄에서 한일 재무장관은 ‘역사는 역사, 경제는 경제’라며 정경분리에 합의했다. 한일관계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한 일이다. 양국 재무장관의 합의는 ‘왜 한일이 잘 지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요체는 협력을 통한 공동의 이익 확보. 국제사회에서 한일이 손잡고 이익을 낼 만한 분야는 경제 말고도 의외로 많다는 것을 양국 재무장관이 인정한 것이다.
재무장관 회담이 열린 23일 일본 삿포로 홋카이도대에서는 한국정치학회 일본정치학회 동아일보 아사히신문 주최로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테마는 ‘한일협력의 미래비전―왜 서로가 필요한가’. 양국의 역량 있는 학자 등 30여 명이 최근의 한일관계를 이상과 현실이라는 복안(複眼)의 시각으로 정리해본 자리였다.
이 심포지엄에서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 중에는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다른, 그러나 경청할 만한 몇 가지 시각이 있다.
우선, 지금의 한일관계가 최악은 아니라는 의견이 나왔다. 양국은 1965년 한일수교 이후 여러 차례 갈등을 겪어왔고, 그럴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왔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현재의 양국관계가 정상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시간의 관점에서 본 한일관계다.
두 번째는 한일 간의 갈등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대두, 일본의 위상 저하, 한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에서 한일 간의 국익 불일치 현상이 빚어짐으로써 어느 정도의 마찰은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진영논리에서 해방된 한국과 일본이 처음으로 자국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공간의 관점에서 본 한일관계다.
세 번째는 한일갈등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의 ‘캐릭터 리스크’로 보는 것은 단견이라는 지적이다. 그들이 권좌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수평, 균질, 다양, 쌍방향으로 바뀐 한일관계가 예전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인물의 관점에서 본 한일관계다.
이런 시각은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한일관계는 이제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관리’해야 하며, 일정 수준의 갈등은 늘 각오하고,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편할지 몰라도 한일은 ‘새로운 50년’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나마 양국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탈국가, 탈정치, 탈중앙의 ‘3탈’이다. 탈국가는 내셔널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국가를 견제하기 위해 건전한 시민사회를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고, 탈정치는 비정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강화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탈중앙은 국가의 위신과 정치적 논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지방 간의 유대를 넓혀 상호 의존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양국 간에 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의도적으로, 꾸준히 계속하지 않으면 새로운 관계조차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게 새로 대두되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심포지엄을 홋카이도에서 연 것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전 아이누족의 근거지였던 홋카이도는 여전히 야당세가 강하고 정서적으로도 한국에 우호적이라고 한다. 고대부터 한반도와의 인연이 깊은 규슈 후쿠오카에서 열린 지난해 한일포럼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어쩌면 이미 ‘3탈’을 실천하고 있는 일본 지방의 잠재력과 친화력이 한일 갈등을 푸는 돌파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홋카이도대의 전신은 1876년에 개교한 삿포로농학교다.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Boys, be ambitious(청년들이여, 야망을 품어라)!’라는 말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미국인 윌리엄 클라크다. 그의 동상 앞에서 야망이 아니라, 한일관계의 진전을 희망해 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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