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인 2004년 11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가정집.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자택으로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만찬을 하던 중 술잔을 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계영배(戒盈杯)’라는 잔으로 전체 용량의 70%를 넘게 술을 따르면 아래 구멍으로 다 흘러내리도록 만든 것이었다.
처음 보는 술잔을 받은 기자는 박 대통령의 ‘계영배 메시지’를 단순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넘어 이렇게 해석했다. “정치하면서 목표와 전략을 분명히 해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이후 행보는 계영배의 교훈과 일치했다. 민족중흥 식의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정권 교체라는 뚜렷한 목표하에 분명하고 간결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그가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는 것은 냉철한 상황 판단하에 선택과 집중을 잘했기 때문이다.
계영배가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청와대가 미국 워싱턴에서 16일 진행될 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계획을 발표한 직후였다. 청와대는 회담에서 △정무·경제 등 양자 차원 협력 방안 △동아시아 및 세계 주요 정세 평가 △북핵 문제 등 대북 공조 △한미 글로벌 파트너십 확대 등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길어야 2시간도 안 되는 회담에서 한 달을 논의해도 결론 안 날 양국의 모든 현안을 건드리겠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왜 딱히 눈에 띄는 것도 없으면서 다 소화할 수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뷔페 같은 의제들을 제시했을까.
이는 올 4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계기로 국내외 전문가들이 더 자주 지적하는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라인의 전략 부재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전략은 목표가 분명해야 나온다. 한국이 급변하는 국제정치 지형에서 ‘뭘 해야 할지(what to do)’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할지(how to do)’가 나오긴 어렵다. 그렇다 보니 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다 갖다 붙이게 된다. 이 때문에 “정작 이번 회담에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역설적인 하소연도 들린다.
하지만 이번 회담의 목표는 별다른 게 있을 수 없다. 다 걷어내고, 신미일관계 속에서도 한미혈맹은 굳건하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워싱턴에서 ‘종합선물세트’를 받아 가겠다는 낭만적인 발상은 일찌감치 접고 아베 총리 방미 후 더 분명해진 미국의 아시아 중시정책 속에서 한미가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 냉철하게 고민해야 한다.
첨예한 이슈인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 문제도 양국 관계에 대한 회의론만 부추기는 말장난 같은 ‘밀당’만큼은 이제 끝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간 본질적 이슈를 접어두고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나 통일대박론 같은, 거창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외교적 구호를 워싱턴에서 이야기해 봤자 겉으로는 환영받아도 실제로는 큰 관심 받기 어려울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베 총리의 방미 이후, 올해 하반기로 예정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워싱턴 방문 전에 잡힌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박 대통령 취임 후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외교 이벤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칫 목표와 전략을 잘못 세우면 성과 없이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정치 입문 후 ‘탄핵 후폭풍’(2004년) ‘문재인 안철수 단일화’(2012년) 등 위기 상황에서 종종 선택과 집중의 한 수로 난관을 돌파하곤 했다. 이번이 다시 한 번 그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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