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국민들 “연금 깎는 건 싫지만 유로존 탈퇴는 재앙”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30일 03시 00분


그렉시트 ‘폭풍전야’… 불안감 확산
7월 6일까지 은행폐쇄 발표되자… 국영은행 ATM에 시민들 몰려가
일부선 기름-식료품 사재기도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처한 그리스 정부가 대규모 인출 사태(뱅크런)를 막기 위해 시중은행의 영업을 정지시킨 29일. 그리스 아테네 시내의 시중은행 지점들에는 노인들만 줄을 섰다. 정부가 신용카드나 현금카드가 없는 연금 수급자를 위해 연금 지급 업무를 오후부터 개시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시내 주유소 곳곳에선 불안에 휩싸인 시민들이 미리 기름을 채워 두려고 몰고 나온 차량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스 정부는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날부터 내달 6일까지 무료로 운행하기로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현금이 바닥나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스에서 신혼여행 중인 발렌티나 로시 씨와 남편 클라우디오 씨는 “호텔에서 신용카드를 받지 않고 현금을 요구해 신혼여행이 악몽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8일 “그리스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소리 없이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그리스 거리에서 27일 새벽부터 ATM 앞에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은 이튿날 아침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테네 시내 중심가에 있는 ATM 스크린에는 하루 종일 ‘기술적 결함’이라는 문구만 깜빡거렸다. 그리스 정부가 자본통제 방침을 발표하자 시민들은 아직 현금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국영은행 ATM 앞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NYT는 기름과 식료품을 사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보도했다. 그리스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은행 주변 경찰 순찰을 늘렸고 방탄조끼까지 지급했다.

아테네의 한 카페에서 친구들과 토론을 벌이던 퇴직자 알레코스 니카스 씨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채권단이 제시한 협상안을 받아들이면 연금이 깎인다고 하더라. 총리가 이를 거부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반면 니카스 씨의 친구 바실리스 방겔리디스 씨는 “(유로존을 떠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며 “음식도 연료도 없는 베네수엘라와 같은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에라토 스피로풀루스 씨는 “구제금융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그리스의 관(棺)에 마지막 못을 박는 행위”라고 블룸버그통신에 밝혔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이날 유럽연합(EU)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구제금융을 연장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스의 미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엇갈리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8일 NYT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내가 그리스 국민이라면 협상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 채권단이 그리스에 혹독한 긴축과 개혁을 무기한으로 요구하고 있다”며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해도 지금보다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반면 유명 투자전문가인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은 “그리스가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하도록 놔둔 뒤 스스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해법”이라고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날 기독민주당(CDU) 창당 70주년 연설에서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며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 파리=전승훈 특파원
#그리스#유로존#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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