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라스 “채권단 제안 대부분 수용”… 국민투표는 강행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일 03시 00분


그리스 ‘디폴트 사태’ 새 국면

그리스가 30일 밤 12시(현지 시간·한국 시간 7월 1일 오전 6시)까지 국제통화기금(IMF)의 채무를 갚지 못하면서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를 맞았다. IMF 71년 역사상 ‘선진경제국(advanced economy)’이 채무 상환에 실패한 것은 그리스가 처음이다. 그리스 정부와 국제 채권단은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1일 협상을 재개했다.

이런 가운데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국제 채권단의 요구 조건을 대부분 수용할 뜻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날 유럽 증시가 일제히 급등세를 보였다. 채권단의 긴축 요구에 강하게 버티던 치프라스 총리가 한발 물러섬에 따라 협상 전망이 밝아졌기 때문이다.

1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에 보낸 서한을 자체 입수해 보도했다. FT는 이 서한에 따르면 그리스 정부는 지난달 28일 공개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최종 제안을 대부분 수용할 의사를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달 30일 보낸 두 쪽 분량의 서한에서 향후 2년간 약 300억 유로를 지원해 달라는 내용의 ‘3차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채권단의 요구 사항을 일부 수정하는 조건으로 대부분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일부 수정 사항은 △섬 지역에만 부가가치세율(VAT)을 30% 인하해 주면 채권단의 세제개혁 요구를 전부 수용 △연금 수령 연령을 67세로 늦추는 개혁도 당장 올해 10월이 아니라 2022년까지로 도입 시점을 연기해 준다면 수용 △저소득층에 지급하는 ‘연대보조금’의 단계적 축소 기한을 2019년 12월까지 늦춰 준다면 역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치프라스 총리는 또 서한에서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 만기 연장 및 제3차 구제금융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당국자 간 합의의 일부 수정이나 부가조건 등을 통해 요구 사항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스 정부는 1일 이와 관련해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의 제안을 조건부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면서도 총리가 채권단의 제안을 모두 수용했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또 그리스 정부가 채권단에 수정안을 제안한 사실도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 정부가 5일 실시하려던 국민투표가 철회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국민투표는 채권단이 지난달 25일 제안한 협상안에 찬성과 반대를 묻는 것인데 그리스 정부 스스로 수정안 제안을 공식화함에 따라 과거 협상안인 채권단 안에 대해 국민의 뜻을 물을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치프라스 정부는 채권단이 3차 구제금융에 합의해 주면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질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거나 국민투표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전했다.

하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1일 TV로 생중계된 긴급 연설에서 5일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천명했다. 자신이 국민투표 실시를 발표한 이후 채권단으로부터 더 나은 제안을 받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국민투표에서 반대표(채권단의 구제금융안 거부)를 던진다고 해서 유로존 내 그리스의 위상이 위태로워지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채권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이날 연방의회 연설에서 “그리스의 국민투표 이전에 협상은 없다”고 다시 한번 원칙론을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어떤 구제금융이라도 IMF을 배제해선 안 된다”며 그리스의 IMF 배제 요구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유로존 각국은 5일로 예정된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를 지켜본 뒤 저마다 판단할 권리가 있다”며 “무원칙하게 타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이날 오후 5시 반(한국 시간 2일 오전 1시 반)에 전화회의를 갖고 치프라스 총리의 새로운 제안에 대해 다시 논의했다. 앞서 미셸 사팽 프랑스 재무장관은 5일 그리스의 국민투표 전까지 그리스와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1일 오후 통화정책위원회를 열어 그리스 은행을 지원하고 있는 긴급유동성지원(ELA) 방안을 논의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리스 사태에 과잉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미국의 금융 시스템에 중대한 타격을 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등과 잇따라 통화하며 원만한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리스 사태가 더 악화돼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기 전에 미 행정부의 개입을 확대하려는 뜻인 것으로 풀이된다.

치프라스 정부의 종잡을 수 없는 ‘벼랑끝 전술’과 ‘위험한 도박’에 EU 지도자들의 반감은 더욱 커져 가고 있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리스 정부는 거짓말을 했고, 협상 파트너들을 배신했으며, 유럽의 규범을 왜곡했다”며 “그리스 국민들은 죽음이 두렵다고 자살해선 안 된다”며 국민투표에서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을 촉구했다.

파리=전승훈 raphy@donga.com /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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