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에 진 빚을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맞은 그리스에서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5일)를 앞두고 심한 국론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은행 문을 닫는 자본통제 조치가 국민투표 다음 날인 6일까지 계속될 예정이어서 서민들이 돈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1일 현금카드나 신용카드가 없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할 수 없는 연금생활자들을 대상으로 은행 문을 열자 큰 혼란이 빚어졌다. 전국 1000여 개 은행 지점이 한시적으로 문을 열었으나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새벽부터 주요 은행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연금생활자들이 장사진을 쳤다. 일부는 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에 눈물까지 흘렸다. 운 좋게 은행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1인당 한도인 60유로(약 7만5000원)밖에 찾지 못했다. 연금생활자인 알렉산드로스 씨는 “지난달 연금도 절반만 계좌에 들어왔는데 60유로만 주면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늘면서 이 중 일부는 쓰레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상태로 내몰렸다. 건설업계에서 일하다 최근 실직한 아테네 시민 니코스 폴로노스 씨(55)는 요즘 하루 8시간씩 시내 쓰레기통을 뒤진다. 1kg에 0.5유로인 구리선과 70개에 1.5유로인 알루미늄 캔을 주워 하루에 5∼10유로(약 6200∼1만2500원)를 벌어 근근이 생활하는 그는 영국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쓰레기통에서 상태가 좋은 음식을 발견하면 바로 먹는다”고 털어놨다.
한편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그리스 전역에서 구제금융안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勢) 대결을 벌였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지난달 30일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는 구제금융안 지지자 2만 명이 모였다. 소나기와 번개가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집회를 강행한 이들은 EU에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이마에 유로화를 붙이고 가슴엔 그리스어로 ‘예’를 의미하는 ‘NAI’ 스티커를 붙인 채 그리스 국기와 EU기를 함께 흔들었다.
은행원 알렉스 알기로스 씨는 “국민투표 결과 그리스의 EU 탈퇴(그렉시트)가 결정된다면 그리스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유로화 체제를 벗어나 드라크마화 시대로 돌아가면 그리스인의 고통이 더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당수 참가자는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진 것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 때문이라며 둘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 남성은 “치프라스 총리와 바루파키스 장관은 적절한 대책도 없이 무조건 EU 탈퇴만 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남성도 “EU를 벗어난 그리스가 (전 세계에서 고립된) 북한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이것이야말로 재앙”이라고 말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는 3일에도 채권단 협상안에 찬성하는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달 29일에는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등에서 약 1만7000명이 구제금융안 반대 집회를 벌였다. 이 집회에는 각각 그리스어, 영어, 독일어로 부정을 의미하는 ‘OXI’ ‘NO’ ‘NEIN’ 깃발이 나부꼈다. 특히 대다수 참가자는 독일어 ‘NEIN’ 깃발을 흔들었다. 긴축정책을 주도한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 독일에 깊은 반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테네에서 생선 가게를 하는 파리스 클로니스 씨는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도시지만 정작 아테네 시민들은 노예처럼 살고 있다”며 그렉시트를 지지할 뜻을 밝혔다. 변호사라고 밝힌 또 다른 남성도 “EU 구제금융안에 서명하는 것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겠다는 뜻 아니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텔레그래프는 변호사 금융인 회계사 등 안정적 직업을 가진 중장년층 그리스인들이 구제금융안 찬성 집회에 몰린 반면에 예술가 자영업자 젊은층은 반대 집회에 몰렸다고 전했다. 이어 “5일 국민투표의 진짜 의미는 EU 탈퇴에 대한 찬반 여부가 아니라 채권단이 제시할 추가 긴축안을 받아들일 용의와 여력이 있는 부유층과 이를 견딜 수 없다는 젊은층의 대립”이라며 국민투표에서 세대, 계급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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