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두 번째다. 지난해 9월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국민투표 취재를 갔을 때 주택가 창문 밖에 가득히 붙어 있던 붉은색, 파란색 스티커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윗집 아랫집이 투표를 앞두고 얼굴을 붉히며 말싸움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번엔 그리스다.
분위기는 스코틀랜드 때보다 더 험악하다. 마치 사생결단을 한 듯하다. 은행이 문을 닫고 현금이 없어서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사람들 눈에는 공포가 가득하다. 아테네 시내 광장에는 연일 찬성파와 반대파들이 각각 집회를 열고 세 대결을 벌이고 있다. 국회의사당 앞 신타그마 광장은 고대 그리스 당시 사람들이 몰려나와 민의(民意)를 논하던 아고라 광장이 재현된 듯하다. 하지만 평화 대신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돈다.
그리스인들은 찬성과 반대를 묻는 투표 앞에서 완벽하게 둘로 나뉘었다. 젊은층과 노년층, 부자와 가난한 자…. 처음엔 긴가민가한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막판으로 갈수록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스코틀랜드 국민투표 전날 밤에도 에든버러 시내에서는 새벽까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스의 국민투표는 알려졌다시피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달 27일 협상장을 박차고 뛰쳐나가 갑자기 발표한 것이다. 유로존 탈퇴를 바라지 않는 대다수 국민들은 처음엔 채권단의 협상안에 ‘찬성하겠다’고 대답한 비율이 높았으나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자본 통제가 시작되자 ‘반대’ 비율이 급격히 높아졌다. 현재로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리스인들의 내부 분열은 국민투표가 끝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상처로 남을 것이다.
오랜 경제위기 속에 번성하는 포퓰리즘 탓일까. 요즘 유럽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국민투표가 때아닌 유행이다.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국민투표 실시에 함부로 동의해 줬다가 혼쭐이 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번에는 2017년까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지난해 크림 반도 주민투표를 구실로 크림자치공화국을 합병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주도 분리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국민투표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중대한 정치·외교적 사안에 대해 국민들에게 직접 의사를 묻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그러나 정책을 놓고 벌이는 ‘국민투표’는 자주 지도자의 신임을 묻는 ‘신임투표’와 연계되곤 한다. 신임투표는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강화할 때 즐겨 써온 수법이다. 나폴레옹이 종신집정관에서 황제가 될 때, 히틀러가 총통으로 취임할 때 실시했던 국민투표가 그 예다. 치프라스 총리도 이번 투표에서 만일 승리한다면 국내는 물론이고 채권단과의 협상에서도 무소불위의 비타협적 권력을 휘두르려 할 것이다.
유럽이 ‘통합’에서 ‘분리’로 가는 거대한 흐름 속에 국민투표가 유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국민투표는 지도자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도박게임이라는 인상이 짙다. 치프라스는 국민투표를 ‘협상의 도구’로 쓰려다가 채권단으로부터 상대할 수 없는 사람으로 찍혔다. ‘유로존 탈퇴’ ‘EU 탈퇴’ ‘영연방 해체’와 같이 세계경제에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 특정 국가나 지역주민의 투표라는 ‘불확실한 도박게임’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공포 그 자체다.―아테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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