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두 차례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3600만원이나 되는 빚을 지고도 나는 10대 때와 변함없이 취업시장에서 환영받을 요소는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딱히 기술이 필요 없고 책임도 별로지지 않는 저임금 노동만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국내의 4년제 대학 졸업생이라면 누구라도 “내 얘기”라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미국의 ‘삼포세대’ 켄 일구나스(32)가 한 말이다.
미국 뉴욕 주의 중산층 집안 아들인 켄은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를 졸업한 뒤 미국의 여느 대졸자들처럼 빚더미를 안고 대학문을 나섰다. 그가 대학에 다니며 편하게 공부만 한 것도 아니다. 대형 마트 카트 정리, 신문 배달, 패스트푸드점 조리사, 정원사, 공공 스케이트장 경비까지 고단한 알바를 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문교양 학위(역사학과 영문학!)를 따느라 빚을 진 거다. 미국도 청년 실업이 장난이 아니다.
켄에게 빚은 ‘격파해야 하는 악당, 죽여야만 하는 용, 쓰러뜨려야만 하는 풍차’였다. 악착같이 벌되 한 푼도 안 쓰는 전략으로 졸업 2년 만에 다 갚았다. 빚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자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빚지지 않고 듀크대 대학원 인문교양프로그램을 마치는 것.
그는 이 도전에 성공했고, 성공담을 새 책 ‘봉고차 월든(원제 Walden on wheels, 문학동네)’에 담았다. 2009년 미국 대학원 얘기임을 감안해 읽으며 국내 대학 생활에 적용해보자. ① 하숙집 말고 봉고차
우선 방값을 아껴야 한다. 켄은 기숙사나 자취방 대신 봉고차에서 먹고 자기로 결정하고 1700달러(약 191만원)를 들여 주거용으로 개조된 1994년형 포드 봉고차를 샀다.
켄이 계산한 봉고차 거주 시 연간 최저 생활비는 4824달러(약 543만원). 그는 책에서 거주 형태를 주택, 기숙사, 아파트, 봉고차, 텐트 5가지로 나눈 뒤 월 최저생활비를 꼼꼼히 계산했다. 이중 ‘기숙사’를 보면 월세 582달러와 식비 382달러를 포함 총 1129달러(약 127만원)가 든다. ‘봉고차’는 월세가 나가지 않는 대신 학내 주차비, 기름값, 보험료 등 차에 월 200달러가 든다. 여기에 식비와 기타 비용을 합하면 월 최저생활비는 402달러로 기숙사보다 생활비를 약 3분의 1 규모로 줄일 수 있다. 이보다 싼 주거 형태는 월 최저생활비가 202달러인 ‘텐트’밖에 없다.
미국엔 ‘봉고차 거주족’이 있나 보다. 봉고차 거주계의 ‘구루’인 밥 웰스의 웹사이트(www.cheaprvliving.com)를 이용해도 좋다. 봉고차 선택법부터 인기척을 없애는 법, 태양전지판 설치법, 화장실 가는 법까지 봉고차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언을 올려두었다. ② 구내식당도 사치다
하룻밤쯤은 없이 사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하지만 봉고차 거주가 일상이 되려면 독하게 마음먹어야 한다. 켄은 논문학기를 제외한 2년을 봉고차에서 살았다. 10센트 단위까지 따져가며, 쓰레기통 뒤지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가난하게 지내야 빚 없이 대학원에 다닐 수 있다.
등록금과 봉고차 다음으로 지출이 많은 부분이 식비. 켄은 하루 세 끼를 모두 해먹었다. 아침 메뉴는 시리얼에 가루우유(냉장고가 없다), 아니면 따뜻한 오트밀 한 그릇에 땅콩버터를 넣어 먹었다. 점심은 바나나와 땅콩버터 샌드위치, 저녁엔 가벼운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하루 식비는 평균 4.34달러.
샤워는 체육관에서(한 학기 회원권 34달러), 노트북, 휴대전화, 카메라 충전은 도서관, 공부는 따뜻한 강의실에서 한다.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땐 도서관에서 무료로 책과 영화 DVD를 빌려본다. 한겨울 봉고차 안은 얼음장 같다. 최대한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버티다 돌아온다. 빨래는 월 1회 동전 빨래방, 쓰레기는 캠퍼스 공중 쓰레기통에. 봉고차에서 지내려면 건강 잘 챙겨야 한다. 의료보험도 없는데 목돈 들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③ 들키지 않기
마지막 남은 대형 지출은 캠퍼스 주차증으로 연간 182달러다. 듀크대 주차 규정엔 자동차 거주 금지 조항이 없다. 물론 다양한 거주 방식을 실험하라고 배려해서가 아니다. 듀크대엔 워낙 사는 애들이 많아 굳이 그런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거다.
켄은 늘 들킬까봐 걱정이었다. 그는 검은 천과 선팅된 창문, 블라인드로 인기척을 없앴다. 불행히도 번잡한 쪽 주차장 자리에 배정받았다. 오후5시 이후부터는 대학 주차장 어디든 원하는 곳에 주차 가능했지만 켄은 기름값이 아깝고, 봉고차가 잔고장이라도 날 까 두려워 주차장을 옮겨 다니지 않았다.
그는 봉고차 거주 7원칙을 만들었다. 첫째, 그리고 둘째도 봉고차 거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셋째, 조명이나 난방을 켜두거나 시동을 건 채 차를 떠나지 않는다. 넷째, 불필요한 소음을 내지 않는다. 다섯째, 요리할 땐 모든 창문을 닫아 냄비가 달그락거리거나 수저 부딪치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 여섯째, 절대 봉고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한다. 일곱째, 절대로, 절대로, 봉고차에서 나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한다. ④ 등록금 깎고, 알바꺼리 찾고
듀크대 대학원 인문교양프로그램의 등록금은 과목당 3313달러. 켄은 ‘재정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끝에(그건 넘 쉬웠다!) 1089달러로 깎았다. 학기당 2개 강의를 수강했고, 석사 학위를 받는데 총 1만1000달러가 들었다.
장학금을 받지 않는다면 알바꺼리를 찾아야 한다. 그는 대학이기에 가능한 알바를 구했다. 온라인으로 참여 가능한 모든 실험에 참가자로 신청한 거다. 신경과학과 인지실험은 시간당 10달러인데 전극으로 자극을 받거나, 바늘에 찔리거나, 약에 취하는 실험이었다. 4가지 주요 체액 중 3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가장 짭짤하되 다소 찜찜한 알바는 MRI 기계에 들어가 두뇌를 스캔 당하는 것. 시급 20달러는 탐나지만 실험 참여 동의서의 문구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자성이나 전파에 노출되어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향후 해로운 영향이 발견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켄은 ‘독서 교육’ 체험학습 프로그램 알바도 했다. 도심지역 초등학교에서 시급 16달러를 받고 주당 20시간씩 일했다. ⑤ 방학 땐 극한 알바로 목돈 마련
방학 땐 실한 알바를 뛰어 한 몫 벌어두는 게 좋다. 미국엔 국립공원 산간지역 관리원이란 알바 자리가 있다. 켄은 방학이 되자 알래스카까지 날아가 게이츠오브더아크틱 국립공원 및 보호구역에서 일했다. 시급 20달러. 극한 알바이니만큼 일당이 많기도 하지만, 이런 곳에선 워낙 돈 쓸데가 없어 목돈을 모을 수 있다. 돈 모으려면 많이 버는 것보다 안 쓰는 게 중요!
공원 내엔 도로도 산길도 인공 시설도 전혀 없어 수상용 경비행기를 타고 출근하고 이동했다. 관리원인 켄은 걷거나 카누를 타고 야생 지대를 순찰하고, 곰이 열 수 없는 식료품 함에 음식을 보관하고, 쓰레기를 줍고, 밀렵꾼이나 불법 어업자를 발견하면 위성전화로 공원 순찰대에 신고했다.
바쁜 일거리도 없고, 대자연을 감상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니 호사 아니냐고? 27㎏짜리 짐을 어깨에 메고, 수많은 모기에 온몸을 물어뜯기며, 곰에게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하는데도?
켄도 그리즐리곰과 맞닥뜨렸다. 무사히 살아 돌아와 하는 말이겠지만, 어려움을 겪게 돼 행복했다고.
“바로 그 순간이 스스로의 한계이자 나의 진정한 본질을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으니까.” ⑥ 비밀 털어놓을 친구 만들기
켄은 외로웠다. 맥주 사마실 돈이 없고, “어디 사느냐?”는 질문을 피해 다녀야 하니 친구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그에겐 메일로 속마음을 주고받는 고교시절 베프 조시 프륀이 있었다. 이 책에서 주인공 켄과 함께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시는 5만8000달러의 빚을 안고 대학을 졸업했다. 성적이 뛰어났지만 취업 시장에선 줄줄이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친구 켄처럼 극한 알바를 하지 않은 조의 대출금은 이자만 불어갔다. 조는 켄에게 보낸 메일에서 대출금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내가 운동화 끈을 묶느라 멈춰서 있는 동안 내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는 퓨마 같아.”
인류에 봉사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정의로운 조시. 하지만 대출금을 갚기 위해 웨스트우드 대학(미국서는 듣보잡 학교) 입학사정관이 됐다. 한국의 입학사정관과는 달리 텔레마케터에 가까운 직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조시 자신처럼 학자금 대출 인생을 살도록 꼬시는 일이었다. 졸업율, 졸업생 취업 현황, 학위를 받기 위해 드는 엄청난 비용, 이곳서 받은 학점이 다른 일반 대학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집이 봉고차’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학우들과 교류가 없었던 켄은 조시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외로움을 이겨냈다. 조시 역시 성실한 친구 켄과 교류하며 통쾌한 반전을 기획한다. ⑦ 멘탈 갑이 되는 스펙 관리
켄이 학창시절 쌓아온 스펙을 보자. 토익점수? 필요 없고, 다른 경력? 없다. 지방 신문사 인턴 자리에 지원했지만 줄줄이 떨어졌다.
‘루저’ 켄은 빚을 갚을 요량으로 3D 업종에 뛰어들었다. 알래스카의 오지에서 모텔 청소하고, 햄버거용 패티를 굽고, 쓰레기를 소각하고, 여행 가이드를 하는 일이었다. 마약사범, 알코올 중독자, 정신분열증 환자, 살인 전과자들이 가득한 일터였다.
하지만 모험거리라고는 비디오 게임밖에 몰랐던 도시촌놈 켄은 이곳에서 미국 사회의 민낯을 확인했다. 북극의 추위 속에서 신체를 단련했고, 알래스카에서 뉴욕 고향집까지 8000㎞를 히치하이크로 횡단하는 용기를 얻었다. 봉고차 주거 방식도 1980년식 쉐보레 서버번을 집으로 삼아 사는 알래스카 노인네에게서 배운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낮고 험한 곳에서 생활하며 그는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문화를 가꾸고, 성찰의 힘과 인문학의 효용을 깨달았다. 충만한 생활에서 건져 올린 귀한 글감은 그를 봉고차 속에 숨어 사는 ‘찌질이’에서 듀크대의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바꿔놓았다.
책은 듀크대 대학원 졸업식에서 켄이 축사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교육을 받기 위해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 대신 부유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의 부유함은 환율이 없는 통화, 녹슬지 않는 주화, 소비해버릴 수 없는 자본인 아이디어와 진실의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비록 이곳을 떠나는 제 지갑은 비어 있을지언정, 나이가 적든 많든, 국내든 해외든, 집이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살아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이 부유함을 간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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