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 교류사와 관련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곳이 있으니 일본 나라(奈良) 시에 있는 정창원(正倉院·쇼소인)이다.
이곳은 26회에 소개했던 현존하는 최대 목조 건축물이자 가장 큰 실내 대불(大佛)이 있는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가 관리하던 고대 유물 창고였는데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정부(궁내청)가 직접 관리하는 유물 보관소로 바뀐다. 그만큼 귀중한 유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정창원은 당시 최대 국책 사업이던 동대사 완공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난(756년) 쇼무 왕의 49재 때 아내 고묘(光明) 왕후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실에서 전해 내려오던 유물 600여 점을 사찰에 헌납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나라 시대(710∼794년) 유물들이 차곡차곡 모아져 무려 1만여 점에 달하게 된다.
‘나라(奈良) 문화의 타임캡슐’로도 불리는 이곳은 1300년간이나 땅이 아닌 지상 건물에서 유물이 전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는 점, 외국(특히 신라)에서 받은 선물들의 포장지까지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 왔다는 점, 그 옛날 물품 종류와 수량까지 낱낱이 기록한 문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점 등에서 일본인들의 철저한 문화재 관리 의식을 보여 준다. 우리로서는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의 빼어난 문화유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은 장소다.
정창원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기 위해 6월 초 나라를 찾았다.
○ 철저한 문화재 관리
서울에서 도쿄 한국문화원을 통해 연락이 닿은 궁내청 정창원 사무소 다쿠야 후루타니 주임에게 “유물들을 볼 수 있느냐”고 했으나 “천황 허락 없이는 안 된다”는 단호한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인터뷰에는 응하겠다고 했다.
나라에 도착했지만 찾기가 어려웠다. 동대사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류장을 지나 내리면 나온다고 들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쿠야 주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접근 금지’ 표시가 된 길을 따라 걸으면 ‘궁내청 정창원 사무소’라는 푯말이 보일 것이라고 했다. 어렵게 도착한 사무실로 들어서니 그를 포함해 직원들이 무려 5명이나 기자를 맞았다. 당황했지만 인터뷰에 열과 성의를 다하겠다는 진심이 보였다.
이들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지상에서 나무 기둥에 의지해 떠받쳐져 있는 고상(高床) 목조 건물인 정창원이 나왔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다. 전형적인 옛날 창고 건물이었다. 정면에 굳게 닫힌 세 개의 문은 왼쪽부터 남창, 중창, 북창이라 불렸는데 건물 안을 세 공간으로 나눠 유물들을 보관한다는 설명이었다.
기자가 놀란 것은 안에 있는 유물들은 물론이고 건물을 보는 것조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관람객들은 건물 앞 3m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고 주변을 걸을 때조차 인도가 아닌 하수구가 있는 옆길로 걸어야 했다. 정갈한 자갈밭인 인도로 걸으면 신발 자국이 남아 안 된다는 거였다. 건물 주변에는 화재에 대비해 물 대포 6개가 서 있었다. 이번 시리즈를 취재하면서 일본인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 의식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정창원에서의 경험도 그런 연장선으로 느껴졌다.
○ 포장지까지 버리지 않는 보존 정신
도대체 어떤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는 것일까. 정창원에서 만난 궁내청 이이다 다히시코 보존과 조사실장 말이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품, 생활용품, 공예품 같은 왕실 유물은 물론이고 8세기 고대 사회상을 소상하게 보여 주는 호적대장, 세금대장, 세출 세입 관련 문서들까지 망라되어 있다. 726년의 야마시로 국 오타기 군 이즈모 마을 계장(호적을 근거로 매년 작성하는 과세대장)에 기록된 이즈모노오미 히로타리 가족 사항에는 이름과 나이뿐 아니라 ‘오른 뺨에 점이 있음’처럼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특징까지 적혀 있다.”
이이다 실장은 이어 “이곳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당나라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 로마는 물론이고 한반도에서 건너온 뛰어난 공예품들과 신라 시대 문서들”이라고 했다.
그가 언급한 문서들이란 1930년대 공개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신라장적(新羅帳籍)’과 ‘신라 제2장적’이다. ‘신라장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충북 청주) 지방의 촌락 실태를 담은 문서다. 815년 청주 부근 4개 촌락의 호구와 전답, 과실나무와 가축의 수효는 물론 전체 인구가 460명이고 노비는 28명(6.1%)이라는 등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소중한 내용이 담겼다.
‘신라 제2장적’은 가로 13.5cm, 세로 29cm의 두꺼운 황갈색 닥나무 종이로 앞면에는 충북 음성으로 추정되는 파천촌 지역에서 정월 1일에 말고기, 돼지고기, 콩, 쌀 등 짐승의 살코기와 곡식을 상급 기관에 바쳤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으며 뒷면에는 지역은 알 수 없지만 관원들의 실명과 함께 급여 액수, 지급 유무가 적혀 있다(권인한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판독).
주목할 만한 점은 ‘신라장적’의 경우 불경(화엄경론)을 쌌던 배접지로 썼던 것을 1930년대에 재발견한 것이고 ‘제2장적’도 신라에서 건너온 놋그릇 포장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가 역시 유물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재발견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풀지 않은 20개 묶음의 신라제 숟가락 세트가 남아 있을 정도(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라고 하니 외국 것이라 할지라도 관리와 보관에 철저했던 일본인들의 보존 정신을 다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매년 가을 나라 국립박물관에서는 정창원 소장 유물들을 중심으로 공개 물품을 달리하는 특별전이 열리는데 한국의 역사학자, 박물관 관계자, 고미술 관계자들 중에는 이때에 맞춰 일부러 오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매년 관람을 놓치지 않는다는 한국의 한 고미술 관계자는 “1000년이 넘어가는 동안 유물들을 얼마나 잘 관리했는지 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라고 했다.
○ 의자왕이 준 바둑판 세트
정창원에 소장된 한반도 유물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백제 의자왕이 일본 귀족에게 주었다는 적색 옻칠장과 그 안에 들어 있던 바둑판, 바둑알 세트다.
이 유물들은 고묘 왕후 유품 목록집에 ‘백제 의자왕이 내대신(內大臣)에게 준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정창원 소장품 중에서 물품 유래를 이렇게 자세히 기록해 놓은 유물이 총 넉 점에 불과한 데다 특히 외국과 관련된 것으로는 유일하다고 한다.
기록에 나오는 ‘내대신’은 누구일까. 이이다 조사실장은 “일본 최고 명문가로 꼽히는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노 가문의 시조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614∼669)를 말하는데 고묘 왕후의 조부(祖父)로 100여 년에 걸쳐 잘 간직하고 있다가 손녀 대에 이르러 절에 헌납한 것”이라고 했다.
연민수 실장은 “바둑은 백제에서 유행하던 놀이로 왕, 귀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자왕이 일본 최고 권력자에게 보낸 바둑판 세트는 당시 일본 조정에서 화제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며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장은 바둑을 통해 왕실과 활발한 친교를 했을 것이니 바둑판 세트는 백제의 대일(對日) 외교 상징물”이라고 했다.
현재 적색 옻칠장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바둑판, 바둑알, 바둑알통은 잘 보존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정창원 측은 바둑판 유물이 백제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예상외의 설명을 했다.
호소카와 신타로 연구원은 “기록에 나오는 ‘의자왕이 줬다’는 바둑판은 1254년 동대사가 벼락을 맞아 화재로 소실됐을 때 다 타 버렸다”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재질이 한반도 육송이라는 점에서 한반도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지만 의자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고 했다.
다쿠야 주임은 “그동안 정창원 유물과 관련해 한일 전문가 간에 심도 깊은 대화는 없었다. 전문가들의 인적 교류를 토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됐다”고 했다.
이제 우리도 일본 내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은 만큼 그의 말처럼 한일 두 나라가 앞으로 활발히 교류하며 고대 한일의 깊은 인연을 오늘날로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후손들이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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