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京都)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778년 창건)를 찾는 관광객들은 매년 1000만 명이 넘는다. 교토를 찾는 5000만 명의 20%에 달하는 수치이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절은 올 3월 미셸 오바마 여사가 방문해 경내에 있는 큰 북을 치는 모습이 전해져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청수사는 고대 한일 교류사 측면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사찰이다. 일본의 고승 엔친(延鎭) 스님과 백제계 도래인 후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758∼811) 장군의 깊은 인연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 일본 건축술의 정수
4월 말 청수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절까지 약 15분간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길을 오르는 동안 하도 사람이 많아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발걸음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약 11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웅장한 본당이 위용을 드러냈다.
‘일본 목조 건축의 불가사의’로 평가받는 유명한 본당 마루는 일본말로 ‘부타이(舞台·무대)’로도 불리는데 못 하나 없이 139개의 대형 느티나무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청수사 학예연구원 사카이 데루히사(坂井輝久·67) 씨는 “한국말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배수의 진을 친다’는 말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본당 건물과 함께 유명한 것이 본당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한 십일면관음보살상이다. 33년에 한 번씩만 일반에게 개방되는 ‘비불(秘佛)’인 관음상이 마지막으로 공개된 때가 2000년 3월이었으니 다시 보려면 2033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자가 청수사를 찾았을 때에도 관음상 주변은 접근 자체가 금지돼 있었고 어두운 차양 막까지 쳐져 어렴풋이 실루엣만 확인할 수 있었다. 사카이 씨는 “일본인들은 평생 두 번만이라도 관음상을 볼 수 있으면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이 관음상을 안치한 사람은 일본인 엔친 스님이지만 사찰 건물은 백제계 도래인 후손 다무라마로가 자신의 집을 헌납한 것에서 비롯한다. 하급 무사였던 다무라마로는 교토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왕의 총애를 받아 북방 오랑캐 정벌을 총괄하는 장군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 한일 고대인들의 인연
758년 청수사가 있는 오토와 산 인근에서 태어난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대대로 야마토 정권에서 군인으로 일하며 이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고 살았다. 일본 역사서 ‘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에는 ‘다무라마로의 조상이 오진왕 20년(290년)에 건너온 백제 왕족 아치노오미(阿知使主·?∼?)’라고 적혀 있다.
12세기 일본 역사서 부상략기 등에 따르면 다무라마로는 아픈 아내를 위해 사슴피를 약으로 쓰려고 오토와 산을 헤매다 산에서 수행 중이던 엔친 스님을 만나 불법에 귀의한다. 그리고 엔친을 위해 자신의 집을 청수사 본당으로 바친다.
청수사에 얽힌 한일 교류 역사를 접하고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정작 사카이 씨는 “다무라마로는 후원자일 뿐이고 건립자는 엄연히 엔친 스님이다. 다무라마로가 한반도 도래계의 후손이라 해서 청수사가 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청수사가 건립된 8세기 말은 한반도 도래인들이 현재로 치면 이민 3, 4세대가 되어 완전히 일본에 동화된 시기이다. 사카이 씨 말대로 그들을 굳이 한반도 도래인이라고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한국과의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할 일도 아닐 것이다.
기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사카이 씨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에 모든 문화를 전해 주었다며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 창조를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청수사 건립에서 다무라마로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 했던 속내가 읽히는 말이었다.
그가 속 좁은 일본인들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하긴 했지만 우리도 이제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것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어떻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체화했는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아량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한국에 없는 문화유산을 일본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 있으니 바로 교토 고산사(高山寺·고잔지)에 남아있는 원효와 의상대사의 흔적들이다.
○ 원효와 의상대사 초상
고산사는 교토 서북쪽 도가노오(e尾) 산 속에 있는 사찰이다.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사찰을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이나 걸려 찾은 이유는 신라 명승 원효(617∼686)와 의상대사(625∼702) 일대기를 그린 두루마리 그림과 초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절 살림을 맡고 있는 다무라 유교(田村裕行) 집사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역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절을 찾는 이들은 하루에 수십 명 수준. 이 중 30%가 한국에서 온 불자(佛子)라고 한다. 다무라 씨는 “일본인들은 경내를 구경하고 경치를 감상하기 바쁜데 한국인들은 합장하고 기도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고산사가 소장한 원효와 의상의 그림은 이들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총 일곱 권짜리 에마키(繪卷·두루마리 그림)와 초상화 한 점씩이다. 모두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무라 씨에게 그림을 보여 달라 하자 “교토박물관에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2006년 교토박물관이 그림을 전시한 뒤 더 많은 관람객들에게 보이기 위해 임대 형태로 박물관에 남겼다는 것이다. 워낙 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고산사에 소장되었을 때도 일반 공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원효와 의상대사의 초상화가 일본 사찰에 있게 된 걸까. 관련 연구로 메이지(明治)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임중 메이지대 연구원은 “8세기경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화엄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원효와 의상대사”라며 “원효와 의상은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화엄종 종주국인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학식이 높은 고승들이었다”고 했다.
원효와 의상은 약간 다른 식으로 일본에 화엄종을 전했다. 원효는 저술을 많이 남겼고 의상은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별기’ 등 화엄사상을 집대성한 원효의 저서는 240여 권에 달하는데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상이 길러낸 제자 중에 한 명인 심상(審祥)은 화엄종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도일(渡日)해 740년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에서 화엄경을 처음 강연했다.
원효와 의상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일본 승려들이 많은데 가마쿠라 시대에 활동했던 묘에(明惠) 스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왕실의 적극적 후원 속에서 번성한 화엄종이 나라 시대 이후 왕권 약화로 쇠퇴하자 묘에는 고산사를 창건해 화엄종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김 연구원은 “묘에가 자기 나라 일본이나 화엄종 종주국인 중국의 승려가 아닌 원효와 의상을 그린 것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 이들의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일본에서 존경받았던 원효와 의상
묘에의 명을 받아 두 고승에 관한 그림을 실제 그린 이는 묘에의 제자이자 당시 이름 높은 화승(畵僧)이었던 조닌(成忍) 스님이었다. 조닌은 중국 송나라 고승 전기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나오는 원효와 의상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토대로 그렸다. 두루마리 일곱 권 중 세 권이 원효도(元曉圖)이고 네 권이 의상도(義湘圖)이다. 원효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나라 유학길에 동굴에서 자던 원효가 목이 말라 맛있게 먹은 물이 해골에 담긴 것이었음을 알고 큰 깨침을 얻는 대목이고 의상도에서는 당나라 유학을 하던 의상에게 반한 선묘 낭자가 귀국길에 오른 의상이 탄 배를 향해 몸을 날려 용이 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치밀하면서도 대담한 화법(畵法)을 구사한 두 고승의 초상화는 현재 남아있는 초상화 중 실제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원효는 생전의 파격적 행보에 걸맞게 호방한 모습이고 의상은 인자하고 후덕한 모습이다.
다무라 씨는 “두 분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던 원본을 일본 화가들이 베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현재 초상화 원본은 한국에 남아있지 않다.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든 일본 화가들이 한국에 와서 존경받는 스님들의 초상화를 모사(模寫)해 갈 만큼 1200∼1300년대 한일 간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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