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리나 충격 어떻게 극복했나? 트라우마 아이들 10년째 상담치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9일 19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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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는 미국 전체의 재난대응 체계와 피해자 트라우마 치료 방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피해자 치료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정도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10년째 피해자 트라우마 치료

8일 오전 어린이 피해자 치료를 주도하고 있는 심리치료 전문병원 머시(Mercy) 센터를 찾았다. 가톨릭계 병원인 머시센터는 대형 재난에 따른 국민 트라우마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미 보건복지부 산하 약물남용정신건강서비스국(SAMHSA)과 손잡고 카트리나 피해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전문 심리상담 및 치료를 제공하는 ‘플뢰르 드 리스(fleur-de-lys)’ 프로젝트‘를 10년간 운영해오고 있다. 프랑스 왕실의 백합 장식문양을 뜻하는 ’플뢰르 드 리스‘는 뉴올리언스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머시센터의 임상심리학자 더글러스 워커 박사(52) 팀이 주도한 이 프로젝트는 의사, 임상심리학자, 심리상담가,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들이 주 1회, 회당 약 1시간씩 각 학교를 찾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인별 혹은 상담 및 치료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 장난감 가지고 놀기 등을 하면서 처참한 재난 당시의 상황을 자연스레 말하도록 한 후 그런 경험과 기억이 아이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학습 장애 등이 발견되면 이 문제를 도와주기 위한 또 다른 전문가를 붙여준다. 이 외 성인 피해자의 장기 재활을 위한 일자리 주선 등 성인 전용 프로그램도 있다.

연간 프로젝트 운영비 약 40만 달러는 전액 SAMHSA가 부담한다. 이 외 일부 종교단체와 독지가들의 현금 기부, 전문가들의 재능 기부 등도 더해진다.

플뢰르 드 리스 프로젝트의 특징은 단순히 아이들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학교에 소속된 상담교사, 해당 학생의 부모에 대한 상담 및 지도까지 병행하는 데 있다. 학교와 집에서 피해 아동을 만나는 성인들이 누구보다 이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잘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해야 아이들의 회복도 빨라지기 때문. 워커 박사는 “카트리나 직후 많은 학부모와 교사들도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는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문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어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10년간 이 프로젝트를 통해 트라우마 치료를 받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무려 3만 명이 넘는다. 대부분은 흑인으로 로워나인스워드처럼 저소득층 밀집지역의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북부 버몬트 주 출신으로 뉴올리언스에 23년째 거주하고 있다는 워커 박사는 “나 또한 두 아들의 아버지였기에 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며 “카트리나 당시 내 집 일부도 파손돼 몇 달간 큰 불편을 겪었고 당시 6세, 4세이던 두 아이가 작은 비에도 몸서리치며 두려워하던 모습을 가슴 아픈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고 말을 꺼냈다.

그는 “저소득층 가정의 피해 아동이 일반 병원에 가서 이런 치료를 받으려면 의사, 임상심리학자, 심리상담가 각각 1명에게 시간당 최소 150달러(약 18만 원)를 줘야 하는데 저소득층 가정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한 아이가 ’심리 치료를 받는 것은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하기 싫다가도 막상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기분이 좋아져요‘라고 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워커 박사는 “카트리나와 같은 대형 재난은 그 피해와 후폭풍이 매우 장기적이어서 반드시 지속적 치료가 필요하다”며 “10년이 매우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 전담 치료기구 설치와 이를 위한 예산 확보 및 전문인력 양성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과제”라며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강조했다.

○ 재난관리 체계도 환골탈태

카트리나 피해가 유달리 컸던 이유는 비상사태 선포 및 대피계획 수립을 주도해야 할 뉴올리언스 시, 루이지애나 주 정부, 재난관리 전문기구인 연방재난관리청(FEMA) 등 3개 주체가 서로 결정을 미루고 다른 쪽에 책임을 전가하다 구조 최적 시점을 놓친 탓이 크다. 즉 명목상으로는 시와 주정부가 현장 대응을, 연방정부가 인력과 물자 지원을 맡는 분권 체제였지만 이를 통한 협력보다는 역할 범위를 둘러싼 갈등만 난무했던 것.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지 4일 후인 2005년 9월 2일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캐슬린 블랑코 전 루이지애나 주지사, 레이 내긴 뉴올리언스 전 시장이 회동했을 때 이 3명이 서로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한 각계각층의 비난이 빗발치자 미 의회는 2006년 ’카트리나 재난관리 개혁법‘을 통과시켜 재난관리의 근본 변화를 시도했다. 우선 9.11 테러 직후 경비 절감을 이유로 국토안보부 산하로 편입됐던 FEMA를 다시 독립기관으로 만들고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FEMA가 국가 재난대책을 진두지휘하는 중심 기관임을 법에 명시했다. 국장 급이던 FEMA 청장을 차관 급으로 높이고 FEMA 청장이 대통령에게 독자적으로 재난발생 상황을 보고하고 의회에 재난관련 정책을 건의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또 대재난이 발생하면 미 50개 주지사가 주 정부는 물론 연방정부 소속의 연안 경비대에도 출동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주 정부와 연방정부의 소통 혼선으로 구조대의 도착 시간이 지연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시 정부의 노력도 뒤따랐다. 뉴올리언스 시는 지난 10년간 146억 달러의 돈을 들여 도시 전체에 약 214km의 홍수 방지벽을 설치했고 총 73개의 배수처리 공장(pumping stations)도 지었다. 미치 랜드류 시장(55)은 올해 1월 시 전체의 홍수 대비체계를 관장하는 ’폭우 관리자(stormwater manager)‘라는 새 직책을 만들고 튤레인대 교수를 지낸 건축공학 전문가 프리시카 윔스 씨(45)를 영입했다.

시청 인근의 수도사업소 건물에서 만난 윔스 씨는 방지벽, 배수처리 공장과 같은 물리적 변화도 중요하지만 시민 스스로가 재난 대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부 대처에 신뢰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 더 의미있는 변화“라며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성향이 강한 미국인의 특성 상 과거에는 허리케인이 왔을 때 대피 명령이 떨어져도 이를 잘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제는 사람들이 이를 충실히 따른다“고 말했다.

○ 풀뿌리 재건문화도 정착

실제 카트리나 후 뉴올리언스 시민들은 ’낡고 비능률적인 정부 기능을 쇄신하고 효율적인 재난대비 체계를 갖추려면 우선 시민들이 먼저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루이지애나주 주립대 보고서에 따르면 카트리나 후 뉴올리언스 주민 24%가 시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공공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다. 카트리나로 일반 공립학교의 상당수가 파손된 탓에 이후 교육 개혁도 자연스레 뒤따랐다. 주민들이 세운 자율형 공립학교(차터스쿨) 재학생 비율은 미 최고 수준인 전체 학생의 무려 70%에 달한다.

뉴올리언스 시민들의 자발적인 재난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곳곳에 설치된 구조 거점(evacuspot)이다. 뉴올리언스 시내를 걷다 보면 사람이 한 손을 높이 든 모양의 독특한 철제 구조물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2013년 6월 만들어진 약 4m 높이의 이 설치물은 ’재해 때 이 곳으로 모여라. 곧 구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구조 거점(evacuspot)’이다.

이를 만든 사람은 미 사진작가 겸 사회운동가 로버트 포가티 씨다. 카트리나 직후 ‘이베큐티어’라는 재난대피 자원봉사 시민단체를 만든 그는 대피할 곳 없던 희생자들이 물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숨졌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설치미술가 더그 콘펠드 씨와 손잡고 총 17개의 구조 거점을 설치했다. 1개 당 건립비용 약 20만 달러는 모두 시민 모금으로 충당했다. 뉴올리언스 미식축구팀 뉴올리언스 세인츠의 스타 선수 스티브 글리슨(38) 씨가 1만5000달러를 내놓는 등 유명인 기부도 잇따랐다.

보스턴 출신으로 25년째 뉴올리언스에서 거주하며 프랜차이즈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크 파워스 씨(45)는 ”카트리나 당시 목격했던 정부의 무능이 역설적으로 시민들의 재해복구 및 시정참여 의지를 높였다“며 ”모든 사람이 일종의 행정가로 변신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고 강조했다.

○ 양극화는 심화

1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다. 바로 뉴올리언스의 뿌리깊은 흑백 빈부격차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카트리나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 서부의 흑인 밀집지역 로워나인스워드(lower ninth ward)를 방문했다. 미시시피 강과 맞닿은 이 작은 마을에서 카트리나로 인한 전체 사망자의 54.5%인 약 1000명이 숨졌다.

왜 작은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생겼을까. 이는 뉴올리언스의 뿌리 깊은 흑백 빈부격차와 관련이 있다. 뉴올리언스 주거지의 80%는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에 있다. 안전하고 높은 곳에 있는 땅이 부족하다 보니 자연스레 집값이 비싼 고지대인 올드 메터리와 메터리 등에는 백인 고소득층이, 로워나인스워드나 샤멜처럼 집값이 싼 저지대에는 흑인 저소득층이 몰려 살게 됐다.

이로 인해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도 극명하게 엇갈렸다. 저지대 흑인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카트리나를 겪었고, 복구가 시작되기도 전인 약 한 달 뒤 또 다른 허리케인 리타까지 맞이했다. 침수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던데다 백인과 달리 홍수 대비보험 가입도 사실상 전무한 이들의 복구 속도가 백인보다 훨씬 느릴 수밖에 없었다.

6일 오후 로워나인스워드를 찾았다. 흉물스런 폐가가 가득한 을씨년스러운 곳일 것이라는 기자의 당초 예상과 달리 의외로 로워나인스워드의 첫 인상은 깔끔하고 아담했다. 미시시피 강변과 마주한 동네 가장자리에는 한 눈에도 튼튼해 보이는 제방이 설치돼 있었고 일반 미 단독주택보다 개성 있고 독특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주택이 여럿 들어서 있어 ‘여기가 우범지역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날 기자를 이 곳을 안내한 강홍조 한인 회장(73)은 ”대부분이 최근 2~3년 안에 지어진 새 집“이라며 ”물난리에 견딜 수 있도록 1층을 높이 띄우고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태양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을을 둘러보자 참혹한 재난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동네 한가운데에 자리한 로버트 그린 씨(61)의 집 앞마당에는 미 국기와 두 명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석이 있었다. 카트리나가 마을을 강타한 2005년 8월 29일 어머니 조이스 그린 씨(당시 74세)와 손녀 샤나이(당시 3세)를 잃은 그가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 그린 씨는 자신의 어머니, 샤나이, 샤나이의 두 자매 등 총 네 사람을 대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원래 지붕 위로 올라가려했지만 지붕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집 전체가 물로 가득 찼고 이로 인해 어머니와 손녀를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자신과 남은 두 손녀의 목숨은 건졌지만 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샤나이의 시신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찾지 못한 상태. 어머니의 시신도 넉 달 후인 12월 말에야 간신히 발견해 2006년 1월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린 씨의 안타까운 사연은 미 언론에도 수 차례 보도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자가 방문했을 때 그가 부재 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린 씨의 이웃인 챈시 헨스 씨(67)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회계 업무에서 종사하고 있다는 그는 카트리나 당시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 살다가 2011년 일자리를 찾아 뉴올리언스로 왔다.

헨스 씨는 ”이 곳을 살기 좋은 주거지로 만들어준다는 정부 약속을 믿고 둥지를 틀었는데 복구 속도가 느려 실망스럽다“며 ”로워나인스워드의 절반은 아직 폐가 상태이며 복구 과정에서 부동산 붐이 일어 집값만 오르는 통에 고향을 떠났던 많은 흑인들이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네 한 복판을 남북으로 가르는 클레이본 애비뉴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헨스 씨가 사는 클레이본 애비뉴 북쪽은 신규 주택이 많은 깔끔한 주거지였지만 남쪽은 풀뿌리와 잡초가 무성한 폐가가 즐비해 한낮에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도 오싹했다. 그는 ”이렇게 버려진 집들이 마약굴로 변해가면서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카트리나 전 뉴올리언스의 흑인 비율은 약 70%에 달해 흑인의 피부색을 의미하는 ‘초콜릿 도시’로도 불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체 인구가 늘고 있음에도 흑인 인구는 더 줄어 흑인 비율이 59%로 떨어졌다. 2013년 기준 뉴올리언스 거주 백인 남성의 평균 연봉은 5만7684달러, 흑인 남성은 절반 수준인 3만4815달러에 그쳐 빈부격차도 더 심해졌다.

카트리나 10주년을 맞아 올해 8월 루이지애나 주립대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뉴올리언스의 복원 정도 및 삶의 질에 대한 뉴올리언스 거주 백인과 흑인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백인 80%는 ”완벽하게 복구됐고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고 했지만 흑인 60%는 ”경제, 교육, 삶의 만족도 등 모든 면이 카트리나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답한 것.

지역 싱크탱크 데이터센터의 앨리슨 플라이어 소장은 ”복구 과정에서 부동산 붐이 일면서 뉴올리언스 중심가 임대로는 10년 전보다 40% 이상 올랐다. 타지로 떠난 흑인 중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오는 사람이 많다“며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뉴올리언스의 진정한 복구가 완료됐다고 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뉴올리언즈=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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