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1월호/세계는, 한국은]
중국의 한반도 기미(羈靡)정책
● 중국의 꿈(中國夢)=세계제국 건설
● “한국은 속국” 인식 남아 있어
● 南의 北 동해항 진출에 거부감
● 김정은 통제하려 김정남 생활 지원
9월 23일 브라질 통화 헤알(real) 환율이 1달러당 4.146까지 치솟았다. 1994년 헤알화 도입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헤알 가치가 속락(續落)하면서 2015년 브라질 국내총생산(GDP)은 4년 전 지우마 호세프 정권 출범(2011년) 시기에 비해 약 2분의 1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의 1인당 GDP는 2011년 1만5984달러, 2012년 1만3778달러, 2013년 1만2707달러, 2014년 1만1567달러에 이어 올해엔 7856달러로 하락할 것으로 추산된다. 내년에는 6653달러로 더 떨어질 전망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같은 대도시에서 호세프 정권 퇴진 운동이 일상화했다. 헤알화 가치 폭락과 브라질 경제의 쇠락은 중국 경제가 10% 넘는 초고속 성장을 끝내고 7% 전후로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중국이 기침을 하자 지구 반대편 브라질이 치명적 독감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을 들었다 놓다
2012년만 해도 브라질은 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을 잇는 6대 경제대국으로 꼽혔다. 2010년 중국-브라질 간 무역액은 560억 달러에 달했고, 중국의 대(對)브라질 직접투자(FDI)는 세계 1위로 170억 달러가 넘었다. 중국은 브라질로부터 철광석, 원유, 콩 등 원자재를 ‘빨아들이듯’ 구매했다. 브라질의 중국 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18% 안팎에 달했다. 그러던 브라질 경제는 지금 끝이 안 보이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중국 덕분에 급성장하고, 중국 탓에 추락하는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제국이 흥망을 거듭했다. 페르시아, 로마, 한(漢), 앙코르, 몽골, 티무르, 오스만투르크, 청(淸), 무굴, 영국 등의 동서양 제국들이 명멸(明滅)했다. 그중 40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중국만이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imperialism)의 공세에도 살아남아 비상(飛上)에 나섰다.
2015년 10월 현재 중국은 인구 13억6000만, 면적 963만㎢, GDP 10조4000억 달러(미국의 59.6%), 군사력 3위 등 ‘세계 제2의 강대국’이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지난해까지 36년간 연평균 9.8%의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2005년 영국과 프랑스, 2008년 독일, 2010년 일본을 제치고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이 됐다. 중국은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이면서 자동차와 컴퓨터, 휴대전화의 세계 최대 소비시장이다. 지난해 중국에서 판매된 자동차 대수는 한 나라에서 판매된 것으로는 사상 최대인 2300만여 대다. 2015년 10월 현재 외환보유고는 세계 최대인 3조8000억 달러 수준이며, 자산 기준으로 공상은행(工商銀行)·건설은행(建設銀行)·중국은행(中國銀行) 등 3개 은행이 세계 10대 은행에 포함된다. 큰 몸집, 작은 옷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중국은 2020년대 초 미국을 제치고 ‘제1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경상 GDP 기준). 2030년경에는 미국과 함께 지구촌 정치·경제 질서를 주도하는 양대 제국(empire)이 될 전망이다.
아이가 성장하면 큰 옷으로 갈아입듯, G2로 부상한 중국은 커진 몸집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국제사회에 요구한다. 중국은 정치·군사·안보와 경제·금융 모두에서 새 질서를 추구한다.
중국은 2014년 5월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 교류 및 신뢰 구축회의(CICA)’에서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라는 중국판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등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 설립도 주도했다.
미국과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로 응수했다. 앞서 중국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에서 지분 확대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지난해 일본 GDP(4조8000억 달러)가 중국 GDP(10조4000억 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IMF 지분 구조는 미국 16.8%, 일본 6.3%, 중국 3.8%다. ADB 지분도 미국과 일본이 각각 12.8%인 데 견줘 중국은 5.5%에 불과하다.
미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 13개 주(州)에서 출발해 압도적 경제력과 해·공군력을 바탕으로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등 모든 대양을 아우르는 세계제국이 됐다. 반면 중국은 유사 이래 외부로의 팽창보다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데 주력해온 내향적 국가다. 근대 이후 등장한 방해론(防海論)은 바다로부터의 적을 막는 데 중점을 두자는 것이며, 방새론(防塞論)은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데 방점을 찍자는 주장이다. 방해론은 친러시아 정책, 방새론은 친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제2의 대국으로 부상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아직 지역 강국에 불과하다.
중국은 급성장한 경제를 뒷받침할 안전한 해로(sea lane)를 확보하고자 서태평양 진출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둥펑(東風-DF)과 잉지(鷹擊) 등 탄도미사일, 훙(轟)-6K 등 전폭기, 전략핵잠수함(SSBN) 개발과 함께 항공모함 추가 건조에도 나섰다. 공산당, 알파이자 오메가
중국의 급성장에 놀란 미국은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통해 일본과 함께 중국의 서태평양 진출을 막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쉬운 것을 먼저, 어려운 것은 나중에 해결한다’는 선이후난(先易後難)으로 정책 방향을 바꿨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내놓고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중국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넘어 인도양, 중동, 동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제3의 대륙’이자 천연자원의 보고인 아프리카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아프리카의 중요성은 18세기 제국주의 시대 이래 아프리카를 차지한 나라가 세계 패권국이 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까지는 영국, 20세기 후반기에는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超)스피드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데서 보듯 중국의 통치체제는 뛰어난 효율성을 지녔다. ‘민주집중제’라고 칭하는 중국공산당 독재 체제로 당·정·군(黨·政·軍)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공산당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살리면서 조직을 견고하게 하고, 통일된 방침과 실행을 보증해 사회의 혁명적 변혁, 사회주의 건설, 공산주의 발전을 위해 민주집중제를 취한다고 주장한다. 당직이 결정되고 난 다음 국가직이 인선되며, 인민해방군이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에 소속됐을 만큼 중국은 공산당 우위의 나라, 공산당이 통치하는 나라다. 공산당이 권력의 알파(α)요 오메가(ω)인 것이다.
중국은 ①마오쩌둥(毛澤東),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의 창업기 ②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한 발전기 ③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로 이어진 성숙기를 거쳐 ④시진핑(習近平) 주도하의 완숙기로 나아간다. 현재의 중국 지도부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의 경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국공내전을 경험하거나 10년 넘게 계속된 문화혁명을 비롯한 살벌한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백전불굴의 용장들이 아니다. 대신 품성과 능력, 조직생활 측면에서 수없는 경쟁과 검증, 권력투쟁을 거쳐 살아남은 시진핑과 리커창(李克强), 왕치산(王岐山)을 포함한 기술 관료(technocrats)가 다수를 차지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100만 대군을 지휘하는 장군이라면,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고급 엔지니어이며, 시진핑은 엘리트 교수에 비유할 수 있다. 시진핑은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해 당(唐)과 같은 세계제국 건설의 기초를 닦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 반열에 들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문화혁명?
9월 말 시진핑 방미 때 드러났듯 중국은 최근 한층 조심스러운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되도록 미국에 맞서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경착륙(hard landing)이 회자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이전과 다르다. 베이징은 고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갈등의 심각성을 우려한다. 지난해 1인당 GDP가 7600달러 수준에 이르렀으나 하루 1.5달러(10위안) 이하로 생활하는 사람의 수가 총인구의 약 15%인 2억 명을 넘는다. 2013년 현재 연 수입 360달러(2300위안) 이하의 빈곤 인구가 8250만 명이다. 사회 불평등이 극심한 일부 중남미 국가와 유사한 수준이다.
2011년 9월 샤오강 당시 중국은행 이사장은 ‘차이나데일리’ 기고를 통해 중국이 빈부차이가 극심한 라틴아메리카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덩샤오핑이 주창한 선부론(先富論)이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 번의 문화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2012년 10월 광둥성 주장(珠江) 공업지대에서 발생한 노동자·농민 소요처럼 농민공(農民工)을 중심으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농민공 혹은 민공(民工)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낙후한 내륙의 농촌지역을 떠나 연안의 발전된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노동자를 뜻한다.
중국 지도부는 중동-북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을 지켜보면서 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의 분노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언론 통제도 이전보다 어려워졌다. 동해로의 출구
2014년 이후 저우융캉(周永康) 전 상무위원,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링후지화(令狐計劃) 전 통일전선부 부장 등 최고위급 인사를 부패 혐의로 처벌한 데는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인민의 불만 또한 잠재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중국 관료들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다. 중앙정부 부국장급 인사의 집에서 우리 돈 200억 원이 넘는 현금이 발견되기도 했다.
중국 외교정책의 우선 과제 중 하나는 안정적 내치(內治)에 바탕을 둔 주변국 포용이다. 서쪽의 파키스탄, 남쪽의 베트남, 동쪽의 한반도(특히 북한)는 외교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반도와 베트남은 북과 남에서 중국을 포위할 수 있는 2개의 날개(翼)다. 중국은 주변국 가운데 3강(强)인 러시아, 일본, 인도와 함께 3중(中)인 한반도(한국과 북한), 베트남, 파키스탄을 특히 중시한다.
북한은 국공내전 시기 인민해방군에게 투항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 2개 사단이 국부군의 추격을 받고 압록강 서안(西岸) 단둥까지 후퇴하자 입경(入境)을 허용했다. 이들은 북한 북부를 통과해 오늘날의 옌볜 자치주로 탈출했다. 북한은 인민해방군에 폭약, 뇌관, 군화 등의 군수물자도 지원했다. 연인원 수십만 명의 재(在)만주 조선인이 승패의 분수령이 된 랴오선(遼瀋) 및 쉬저우(徐州) 전투, 양쯔강 도하 작전을 포함한 다수 전투에 참전해 인민해방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0년대 이래 장기간 계속된 중소분쟁 △1992년 7월 한중 수교 △2014년 7월 시진핑의 선(先)방한 등 북중 관계를 악화시키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는데도 북중 관계의 기본 틀은 변하지 않고 있다. 공산당 서열 제5위인 류윈산(劉雲山)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에 참석할 정도다.
중국에 북한은 아직은 버려서는 안 되는 완충지대(buffer zone)다. 최근 중국 내에서는 한국까지 미국과 일본 세력에 대한 완충지대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중국에 북한은 숙적 일본의 도쿄-오사카축 등 전략종심(戰略縱深)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곳이며, 북만주와 장강 델타, 주강 델타의 산업지대를 연결해주는 동해로의 출구이기도 하다.
중국은 한국을 포함한 제3국이 동해의 항구인 나선과 청진,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 등 북·중 국경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특히 나선 진출에 거부감이 강하다.
‘한반도 不統不亂’ 원칙
중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의 원칙은 ‘안정과 현상유지(不統不亂)’인데, 주변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 지속적으로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현실적 이해관계가 그 배경에 있다. 중국이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보여준 태도도 이러한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3대 세습을 지원해 북한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김정은 체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중국은 김정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려 그의 이복형 김정남의 생활을 지원한다고 한다. 당나라는 망명해온 발해 무왕의 동생 대문예(大門藝)를 이용해 발해를, 신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이용해 신라를 견제했다. 원나라도 요동의 심양왕과 개경의 고려국왕 사이를 이간하는 방법으로 고려를 견제했다.
중국 처지에서 볼 때, 미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이 북한을 접수하면 150만 명 이상의 재중동포가 거주하고 한반도와 역사적 연결고리도 있는 만주지역이 상시 불안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현재로선 중국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받아들일 리 없다는 뜻이다.
시진핑의 국내외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도 덩샤오핑적 현실주의, 즉 도광양회(韜光養晦, 실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림), 겸허저조(謙虛低調, 겸허하고 낮은 자세를 견지),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적극 나섬)가 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베이징의 대외정책은 중국이 처한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사회적 상황, 역사적 경험 및 해당 시점의 국제정세에 따라 결정된다. 시진핑 역시 대미 협조와 갈등의 이원구조 속에서 한반도의 안정을 우선시하면서, 미일 세력에 대해 대응하는 차원에서 대한반도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시진핑이 한국을 먼저 방문한 반면 북·중 정상회담이 아직 없다는 사실 등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져 보이는 것은 급부상한 중국의 자신감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중관계 증진과 관련한 북한의 반발은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히 국익의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것이다.
2008년 5월 중국 외무성이 이명박 정부의 미국 일변도 외교에 대해 쌓인 불만을 ‘한미동맹은 냉전의 유물’이라는 말로 표출한 적이 있다. 베이징, 톈진, 상하이, 다롄 등 중국의 정치·경제 중심지를 타격할 수 있는 전략요충에 위치한 한국의 행보가 중국으로서는 그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한국이 핵공격 받을 수도”
‘대륙의 붉은 별’ 저자인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가 확인한 바와 같이 마오쩌둥은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인식했다. 장제스의 인식도 같았다. 이 같은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반도 등 인근 지역에 대한 중국의 정책을 요약하면 분할과 지배(Divide · Rule), 다시 말해 코뚜레 꿰기라고 하겠다. 1992년 한중 수교도 한국을 이용해 북한을 견제하는 기미(羈靡, 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끈은 끊지 않음)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한반도 정세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북한에서 김정은 아닌 그 누가 집권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력이 증강할수록, 서태평양으로 동진하려 할수록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높아진다. 한국은 서태평양으로 향하는 데 길잡이가 되면서 중국인에게 유리한 국제 규범 및 제도를 주장할 때 그것에 대한 지지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안정과 통일을 위해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과 가까워지려면 미국과의 관계도 굳건히 해야 한다. 강대국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의 조화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한·중 간에는 △북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 △고대사 문제 △이어도를 포함한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선 획정 문제 등 난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미국 군산(軍産)복합체의 이해관계와도 밀접히 관련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문제 또한 난제다. 인줘(尹卓) 인민해방군 해군 소장은 2014년 8월 CCTV와의 인터뷰에서 “사드의 주요 공략 대상은 중국과 러시아의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이다.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면, 이는 한중관계를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이 제3국의 선제 핵공격을 받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강인국’과 ‘염석진’의 길
우리가 중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대처 능력을 갖췄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동맹세력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동맹국이나 우호세력의 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대가가 수반된다. 동맹이나 우호관계에도 강자의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은 러시아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동맹국 영국이 강력하게 반대했는데도 영국군의 트라이던트 핵미사일 배치 정보를 러시아에 넘겨줬다.
동맹이란 것이 이렇기에 우리도 동맹국 미국에 대가를 요구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사드의 한국 배치를 원한다면 반대급부로 △사용 후 핵연료의 안전한 재처리와 보관을 포함한 핵연료주기(Nuclear Fuel Cycle) 완성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 △스텔스 기술 등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제공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10월 3일 베이징의 한 영화관에서 중국인 100여 명과 함께 중국어 자막이 깔린 영화 ‘암살’을 봤다. 일제에 항거한 애국자들의 활약을 잘 묘사한 듯했다. 함께 관람한 중국인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다만 같은 민족끼리 죽이고 죽는 내용이 나와 씁쓸하기도 했다. ‘강인국’ 같은 부일파(附日派)들과 ‘염석진’ 같은 변절자들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삶을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 ‘영감’의 말이 떠오른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어. 모두 다 일본인 되고, 중국인, 미국인, 멕시코인이 됐는데….”
중국의 초고속 굴기(굴起)와 일본 우익 정치 엘리트들의 거국적 대응이 몰고 올 어두운 그림자가 한층 짙어진다. 대통령과 안보실장, 외교장관, 국방장관 등 우리 외교안보 최고위 인사들은 불과 70년 전까지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앞으로 다시 인근 외세의 침략 아래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까. ‘암살’을 본 우리 관객들은? 절대 양보할 수 없거나, 반드시 이뤄야 할 핵심이익(core interest)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보호하고, 달성할지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가.
▽중국의 골칫거리 소수민족▽
위구르인, 중동 · 아프리카 이슬람 세력과 연계 시도 변경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골칫거리다.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가 특히 심각하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원주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계 위구르인이다. 위구르인은 우루무치(烏魯木齊), 쿠카(庫車), 야르칸드(莎車), 카슈가르(喀什) 등 신장 곳곳에서 수백여 차례 반중(反中) 소요를 일으켰다. 지금도 위구르인의 소요가 이어지고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중국의 안보와 통합을 위협하는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신장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들과 접경해 극단주의 단체인 이슬람국가(IS), 알카에다, 탈레반 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8월 17일 태국 방콕 에라완 사원 폭탄테러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위구르인은 중동-아프리카 지역 이슬람 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 티베트(吐蕃) 문제도 있다. 시진핑은 부주석 시절이던 2011년 7월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앞에서 개최된 이른바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티베트가 ‘평화적으로 해방’된 후 티베트 주민의 생활이 얼마나 개선됐는지를 강조했다. 중국은 1951년 인민해방군을 티베트에 진주시켰다. 이후 티베트 영역의 상당 부분을 분할해 칭하이(靑海)성, 쓰촨(四川)성, 윈난(雲南)성 등에 통합했다. 티베트 영역을 대폭 축소한 것. 인도 다름살라에 소재한 달라이 라마 등 티베트 망명 세력은 자치를 요구한다. 주목할 점은 쓰촨성과 칭하이성에 거주하는 150만~200만 명의 티베트인이 티베트 자치구의 티베트인보다 훨씬 민족주의적이며 중국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것이다. 쓰촨성 서북부 간즈 티베트인 자치주와 아바 티베트·강족(羌族) 자치주 등에 위치한 라마 사원을 중심으로 2011년 10월 이래 승려의 분신 등 티베트인의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의 배후에 자리한 인도를 겨냥해 서북부 고원지대 칭하이성에 사거리 1700㎞의 둥펑(DF) 21-C 탄도미사일을 배치했으며 신장과 티베트의 안정과 통합, 장기적으로는 위구르인, 티베트인의 중국에 대한 동화를 추진하고 있다.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고산과 협곡, 사막 등 격오지(隔奧地)에 발전소를 짓고, 전신주를 세우며, TV를 무료로 공급해 한족이 주도한 중국의 발전상을 홍보한다. 2006년 7월 칭하이성 성도인 시닝(西寧)과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싸를 연결하는 고산철도를 개통한 것도 티베트와 외부 세계 간 교통을 원활하게 해 티베트를 내지화(內地化)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소수민족 문제는 아니지만, 홍콩의 민주화와 관련된 사안도 베이징의 골칫거리이자 향후 불안정의 뇌관이 될 수 있다. 장량(張良) | 중국청년정치학원 객좌교수 · 정치학박사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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