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파리 연쇄테러 배후인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전시(戰時) 지도자’로 변신하고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16일(현지 시간) 베르사유궁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면서 “현재 프랑스는 전쟁 중”이라며 “IS와 맞서 테러리즘을 궤멸시키겠다”고 역설했다.
이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이라는 평이 나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9·11테러 이후 내놓은 정치적 수사(修辭)와 비견되는 역사에 남을 연설”이라고 보도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연설 내내 IS 대신 지난해부터 프랑스 정부가 써 온 ‘다에시’(Daesh·IS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 낮춰 부르는 아랍어. ‘짓밟다’는 뜻의 다샤(daasha)와도 비슷하다)라는 표현을 썼으며 그들을 ‘야만인’ ‘적’이라고 불렀다.
중도좌파 사회당 출신인 올랑드 대통령은 평소 갈등을 회피하는 유약한 이미지로 ‘마시멜로(부드럽고 물렁물렁한 양과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연설에선 “이 전쟁은 문명사회의 일원이 아닌 세계를 위협하는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야만인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공격해 와도 프랑스는 변함없이 프랑스로 남을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프랑스의 영혼을 망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IS 격퇴를 논의하기 위해 조만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도 요구했다. 연설이 끝나자 정부 각료 및 상하원 의원들은 모두 기립해 박수를 보냈으며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공화정이 설립된 1848년 후 베르사유궁에서 대통령이 연설한 것은 프랑스 역사상 세 번째”라며 이번 연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헌법 개정 등 국가적 중대사를 논의할 때만 프랑스 상하원은 베르사유궁에 모인다.
올랑드 대통령이 ‘11·13 파리 연쇄테러’ 사건 직후 ‘전쟁’을 선포한 것은 프랑스군을 시리아나 이라크로 깊숙이 보내기 위한 사전 조치로 보였다. 프랑스군이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위권이나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전쟁 선포가 불가피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16일 이웃 국가를 향해 “유럽연합(EU)이 국경 통제를 하지 못하면 결국 EU가 해체될 것”이라며 국경 강화를 요구했다.
올랑드 대통령의 행보에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먼저 화답했다. 케리 장관은 16일 파리를 깜짝 방문해 프랑스와 함께 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케리 장관은 이날 오후 파리 시내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테러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해 “다에시와 그들의 비열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세력을 모두 분쇄하고 처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모두 파리지앵”이라며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을 넘어 친구이며 가족”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는 1만여 명의 잠재적 테러 용의자 정보를 담은 ‘S파일’의 관리를 미국과 정보 공유를 통해 강화할 계획이다. 파리 테러범들이 이미 S파일에 포함돼 있었지만 당국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올랑드 대통령의 ‘전시 행보’에 대해 비판적 시각도 있다. 도미니크 드빌팽 전 총리는 프랑스 라디오에서 “올랑드 대통령이 ‘전쟁’을 언급한 것은 실수”라며 “IS에 지나치게 무게를 실어줄 뿐만 아니라 과거 중동 정책의 실책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올랑드 대통령이 테러와 맞서 싸우기 위한 개헌의 필요성까지 주장하자 “너무 나갔다”는 말이 쏟아졌다. 올랑드 대통령은 테러 공격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중 국적자의 프랑스 시민권 박탈 절차를 간소화하도록 법률을 개정하고,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외국인의 신속한 강제추방 등을 골자로 한 테러 대응 계획을 내놓았다.
프랑스는 16일에 이어 17일 새벽에도 자국 내 테러조직 은신처 128곳을 급습해 23명을 체포하고 로켓 발사기를 포함한 무기류 31개를 압수했다. 프랑스 정부의 한 소식통은 16일 시리아에서 귀국하는 모든 자국민을 가택 연금하고 엄중 감시할 수 있다고 AFP통신에 밝혔다. 베르나르 카즈뇌브 프랑스 내무장관은 전날 “증오를 설파하는 모스크를 해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마뉘엘 발스 총리도 ‘극단주의자를 숨겨주는 모스크’의 문을 닫을 수 있다고 압박해 프랑스의 ‘톨레랑스(관용)’ 전통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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