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감산(減産) 합의에 실패하면서 7일(현지 시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배럴당 37.65달러로 6년 10개월 만에 최저가로 곤두박질쳤다. 장기 불황으로 원자재 가격이 떨어진 데다 미국 셰일가스 혁명과 북미지역의 원유 생산량 증가로 ‘기름값이 물값 수준으로 떨어지는’ 초(超)저유가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유가 급락의 여파로 어제 한국 코스피는 1,940 선으로 밀렸고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주요 증시도 하락세를 보였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저유가는 축복이었다. 1980년대 3저(저달러·저금리·저유가) 현상으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듯이, 마이카 운전자부터 원유를 수입해 철강 반도체 선박 석유화학 제품을 만드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까지 유가 하락은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다르다. 중동 산유국들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의 철강 조선 기계 플랜트 석유화학 제품 수출이 타격을 받게 생겼다.
당장 중동 오일머니가 신흥국들에서 빠져나가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 때 같은 신흥국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소리도 나온다. 이미 국내 증시에선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3개월간 약 3조 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자동차 항공 정유 등은 일부 반사이익을 얻지만 저유가가 더 심각해지면 디플레와 함께 이런 산업들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암울한 관측이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석유를 장악하면 국가를 장악할 수 있다”고 했다. 저유가로 인해 글로벌 지경학(地經學)도 재편되는 양상이다. OPEC가 감산 합의에 실패한 표면적 이유는 내년 석유 수출을 재개하는 이란과 비(非)OPEC 회원국인 러시아 때문이지만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을 쓰러뜨리려 했다는 음모론이 나온다. 미국은 자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동 석유 의존을 줄이고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셰일오일과 셰일가스 대량 추출에 나섰고, 마침내 에너지 패권국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번에 가장 타격을 받은 나라도 중동 산유국을 비롯해 러시아 베네수엘라 심지어 이슬람국가(IS) 등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곳들이다. 미국 대신 세계 최대 원유수입국 자리를 물려받은 중국은 한층 복잡해진 ‘신형대국관계’ 계산을 해야 할 판이다.
변화무쌍한 글로벌 시장의 상황을 살펴 한국 경제에 충격이 적도록 단단히 대비해야 할 때다. 불황에도 유연하게 경쟁력을 다지는 기업과 국가만이 호황을 맞을 수 있다. 산업 구조개편과 기업 구조조정을 늦춰선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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