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인 지난달 13일 금요일 밤. 나는 파리 인질극 테러가 벌어진 바타클랑 극장에서 4km쯤 떨어진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카페 안에 설치된 TV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밖에서 앰뷸런스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파리 시내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상했던 것은 축구 경기를 생중계하는 프랑스 최대 민영방송 TF1 화면에는 ‘폭탄테러 발생’이라는 자막 한 줄 나오지 않았던 것.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나서야 TF1은 ‘뉴스 속보’로 테러 현장을 연결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바타클랑 극장뿐 아니라 축구장 인근에서도 자폭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뒤 나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한국 같았으면 속보 자막이 신속하게 나왔을 텐데….
그날 밤부터 몇 주간 파리에서 ‘종군기자’ 역할을 했다. 테러범 검거 작전이 펼쳐지는 생드니 현장에서 직접 총소리를 듣고, 총탄 자국과 혈흔이 선연한 거리를 돌아다녔다. 파리 특파원 부임 이후 이집트 한국인 관광객 폭탄테러,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분쟁 같은 분쟁지역 취재를 많이 다녔지만 올해 테러의 표적이 된 파리의 상황은 여느 중동 국가 못지않았다.
1월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과 ‘11·13 파리 연쇄테러’ 사건을 취재하면서 프랑스 언론과 시민들의 위기대응 방식에 새삼 놀라곤 했다. 수많은 혁명을 겪은 나라여서 그런지 시민들은 비극적 사건에도 침착하고 차분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점은 ‘희생양 찾기’나 ‘마녀사냥’이 없다는 점이다. 경찰이 테러범을 번번이 놓치고, 요주의 인물 감시망에 구멍이 뚫린 터라 우리 같았으면 벌써 장관이나 경찰청장이 몇 명쯤 옷을 벗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언론은 테러를 저지른 ‘이슬람국가(IS)’에 대한 비판과 대응에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오히려 ‘군기 빠진 프랑스 경찰’ ‘무능한 프랑스 정보기관’ 같은 비난은 한국의 일부 언론이나 누리꾼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대표적인 것이 ‘축구장 8만 관중 놔두고 나 홀로 피신한 프랑스 대통령’을 비판한 기사이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침착한 대처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정작 관련도 없는 한국에선 논란이 되는 것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IS가 이날 밤 가장 원했던 것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축구 경기 도중에 자폭테러로 관중이 패닉에 빠져 수백 명이 압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만일 첫 번째 폭발음이 들렸을 때 경기를 중단하고 대피 소동을 벌였다면 밖에서 기다리던 제2, 제3의 테러리스트가 수만 명의 군중 틈에서 손쉽게 자폭테러를 벌였을 것이다. 이날 프랑스 경찰은 대통령 참석 행사라 철저한 검문검색이 이뤄진 경기장 내부가 경기장 밖보다 더 안전이 확보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경기를 진행했다고 한다.
올랑드 대통령은 경기장을 떠나기 직전 VIP 관람석에 있던 정부 관료와 축구협회 관계자들에게 “모두들 제자리를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한꺼번에 귀빈들이 자리를 뜰 경우 관중이 불안해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때에도 프랑스 국민들은 차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지구촌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테러에 대한 충격은 그보다 더 크지만 바타클랑 극장은 다시 문을 열었고 테러가 일어났던 카페에도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IS에 대한 가장 큰 복수는 ‘일상으로의 복귀’라고 말하는 파리 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