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한 이후 러시아 극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한국 기업들도 진출을 구체적으로 타진하는 곳들이 많다. 과연 극동은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본보 취재팀이 올 10월 러시아 극동의 중심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해 나홋카, 하바롭스크 등 주요 도시를 돌아보니 이 일대는 저유가로 현재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속해 있는 연해주는 하반기 외국인투자가들에게 세금을 대폭 내렸으며, 나홋카 자루비노 등 극동 대부분 항구들은 수입 관세를 대폭 줄이는 자유 항구로 지정됐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연해주 개발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북한도 이 일대에 인력 송출을 늘리고 있었다. 동면에서 깨어나고 있는 극동 개발 현장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
10월 1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북쪽 직선거리로 약 80km 떨어진 나홋카 항. 대형 크레인 70대가 쉴 새 없이 시베리아에서 채굴한 철광석과 석탄을 수출 선박에 싣고 있었다. 최근 유가 하락과 서방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나홋카 항의 물동량은 오히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철광석 및 석탄 수출량은 2012년 688만7000t에서 지난해 931만6000t으로 늘었다. 물류회사 에브라스의 홍보총괄자 스베틀라나 알렉시바 씨는 “일본이 에너지 자원 안보 차원에서 석탄 수입을 크게 늘린 결과”라고 말했다.
러시아 대부분 지역의 경제가 위축되고 있지만 극동 지역만큼은 예외로 보였다. 러시아 정부는 올해 9월 수입품 무관세 통관을 골자로 하는 자유항 개설 등 전격적인 개방 조치를 내놓았다. 직접 찾아 확인한 러시아 극동에서는 경기 불황의 돌파구와 신성장동력 등 활로를 찾으려는 중국과 일본, 남한과 북한이 투자와 무역, 일자리 창출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 블라디보스토크를 홍콩처럼
극동 중심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는 2차로 도로에 차량이 쏟아져 나와 시민들이 건널목을 건너는 데 10분 이상 기다리는 모습이 여러 차례 보였다. 택시 운전사 세르게이 아카판피로프 씨는 “중국 일본 한국에서 관광객과 투자자들이 몰려온 뒤로 시내 도로가 너무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러시아 극동투자청 공무원들은 “러시아 극동 개발은 1905년 러일전쟁이 종료된 뒤 1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러시아 정부는 올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형 경제포럼인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을 열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이 포럼에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인근인 자루비노 등과 묶어 홍콩·싱가포르 수준의 자유항으로 만들고 하바롭스크 등 9곳에 경제자유구역(FEZ) 수준의 산업기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방문비자 제공, 자유 관세지역 조성, 최고 5년간 법인세 면제 등의 구체적인 투자 유인책도 제시했다.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는 러시아는 극동 지역 개발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이 지역은 연해주, 아무르 주 등 9개 주로 러시아 면적의 36%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러시아 전체의 4.3%에 불과하다. 하지만 러시아 전체 지하자원 중 다이아몬드 98%, 주석 80%, 금 50% 등을 차지하는 자원의 보고다. 러시아 최대 해상 물류기업인 페스코의 발레리 메스툴로프 사장은 “우리 기업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부산까지 달려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나홋카 항의 물류 중개회사인 TRF유나이티드의 고객 서비스 담당 크릴 시도렌코 씨는 “자유항 선포로 극동 경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베리아 도시들도 극동의 특수에 들썩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주트린 이르쿠츠크 역장은 “바이칼 호 관광열차의 승객이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 극동에서 격전 벌이는 한중일
철도 항만 건설 현장에는 ‘잠자는 동토’ 극동을 향한 한국 중국 일본의 투자 열기가 이미 불붙어 있었다. 중국은 이미 동북 3성 주요 도시를 고속철도로 연결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두드리고 있었다. 러시아 극동투자청 관계자는 “훈춘(琿春)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고속철로 연결하자는 중국의 제안이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를 잇는 육·해상 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앞세워 자금과 인력을 극동으로 보내고 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에서 러시아로 들어온 농업경영 기업은 이미 150여 개에 달하고 연간 170만 t의 곡물을 생산하고 있다.
중국이 거세게 진출하자 일본이 견제구를 날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지난해 극동에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거쳐 도쿄(東京)까지 이어지는 가스관 건설을 러시아 국영가스업체 가스프롬에 제안했다. 러시아 극동의 도로에서 보이는 차량의 90% 이상은 일본제였다. 택시 운전사 테오도로 카타라차 씨(46)는 “일본차가 추위에 강하기 때문에 잘 팔린다”고 말했다.
한국도 극동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 한국은 중국의 견제 카드다. 이 때문에 안보문제 등에서 부담이 덜한 한국이 더 많이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10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14차 한-러 경제과학기술공동위원회는 투·융자 실무협의체를 구성해 양측의 협력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양국은 이미 한국의 수출입은행과 러시아의 대외경제은행을 중심으로 30억 달러의 자금을 공동 조성키로 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에 러시아를 방문하면 한-러 정부가 추진하는 나진-하산 프로젝트도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도 극동 지역에 거는 기대가 크다. 노동력 수출을 통해 ‘현금’을 받는 것 외에도 중국에 의존한 경제 상황을 러시아를 통해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최근 평양-블라디보스토크 직항로를 개설한 데 이어 나홋카 소재 총영사관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며 러시아와의 협력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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