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리자 아르촘이라는 지역에서 산허리를 깎아 짓고 있는 대형 카지노 건물이 보였다. 건물 하나만 겨우 완공됐는데 카지노 객장은 벌써 문을 열어 놓았다. 이곳으로 러시아 현지인들이 줄지어 들어가는 동안 중국인 인부들이 온몸에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시멘트 포대를 등에 메고 분주하게 다녔다. 대형 연회장과 숙박시설 등 카지노 부대시설에 투입된 인력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었다.
양기모 KOTRA 블라디보스토크무역관장은 “카지노의 투자자는 마카오 출신의 중국인들인데, 앞으로 22억 달러를 들여 카지노 옆에다 호텔 17개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극동이 외국인에게 문을 열어 놓고 개발의 기지개를 켜자 중국 자본이 물밀듯 몰려가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국 자본의 입질이 거세진 시점은 지난해 7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을 방문한 이후부터다. 당시 시 주석은 랴오닝(遼寧) 성, 지린 성, 헤이룽장(黑龍江) 성 등 동북 3성 지도자를 불러 놓고 “동북의 부흥은 돌을 산 정상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滾石上山·곤석상산) 같지만, 앞으로 국가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동북의 개발이 그만큼 어렵지만 중국의 1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2016∼2020년) 기간에 국가 차원에서 동북을 지원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이었다.
○ 극동을 집어삼키려는 중국의 기세
10월 2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두만강 쪽으로 4시간 자동차로 달리자 중국 방문객을 태운 대형 버스들이 2차로 도로를 가득 메웠다. 대부분 동해에 인접한 러시아 슬라뱐카 항구나 자루비노 항구에서 중국 훈춘(琿春)으로 이동하는 승객들이었다. 슬라뱐카 호텔 1층에 도착해 매니저에게 ‘중국인이 얼마나 많으냐’고 물었더니 러시아인 매니저는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중국인이 호텔과 도로를 모두 차지한다”고 말했다.
슬라뱐카에 인접한 자루비노 항구에서 중국 국경선까지는 38km에 불과하다. 그런데 항구 부근에서 만난 중국인은 이 도로를 “악마도 무서워하는 길”이라고 불렀다. 한 중국인은 “슬라뱐카에서 러시아 명태를 들고 중국 국경을 통과하는데 비자와 서류 검사를 7번이나 하기 때문에 짐은 아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치고 빈손으로 중국으로 돌아가는 상인이 많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국경지대에서 검문을 심하게 하고 통과 절차도 까다로워지자 한국도 올해 속초에서 자루비노 항구로 정기적으로 운항하던 여객선을 끊어 버렸다.
그런데도 중국 지방정부들은 요즘 대규모 프로젝트를 러시아에 잇따라 제안하고 있다. 지린 성은 지난달 창춘∼훈춘 고속철로를 개통해놓고 러시아 연해주에 “훈춘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고속철도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러시아가 받아들이면 이 고속철은 최초의 국경 고속철도가 된다. 훈춘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180km 거리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지금은 차량으로 5시간가량 걸린다. 고속철이 개통되면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지린 성의 고속철 제안은 중앙정부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일환이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잇는 고속철도 건설 계획을 이미 내놓았다. 이 계획은 2420억 달러가 들어가는 초거대 건설 프로젝트다.
연해주에 대한 중국의 투자 배경에는 해외 거점에 대한 집중 투자 이후 중국 본토 경제권과 연결해 투자 효과를 끌어올리겠다는 복안도 깔려 있다.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 거점으로 선정된 도시에 대해서는 자국의 지사를 설치하고 자금 융통을 위한 은행지점 설치도 허가했다. 중화경제권을 확대하려는 구상은 러시아의 견제 본능을 자극하는 포인트다. ○ 러시아의 견제, 한국의 기회
중국과 국경을 맞댄 러시아는 중국의 동북3성이 “동북아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렉세이 체쿤코프 러시아 극동개발기금 대표도 이런 우려를 드러내며 “훈춘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고속철도로 연결한다는 제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고 취재진에게 밝혔다.
접경지대의 대북 투자에서는 러시아가 이미 중국의 기세에 밀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중국 양국이 북한 땅과 잇는 두만강 다리다. 러시아 하산과 북한 나진을 잇는 철교는 노후화가 심각하다. 지금도 이 철교 위에서는 기차가 시속 20km 미만의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러시아는 2000년대 후반부터 나진-하산 철도 개·보수에 공을 들여왔지만 남북한 사이에서 협력을 이끌어내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이 중국은 신두만강대교를 거의 완성했다. 신두만강대교는 훈춘 시내에서 50km가량 떨어진 두만강 하구에 있는 취안허(圈河) 세관과 연결돼 있다. 이 다리는 내년에 준공된다. 중국이 선제 투자로 북-중-러 삼각 협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러시아는 요즘 중국 견제 카드를 내놓고 있다. 중국 대신 다른 나라의 자금과 인력을 끌어들인다는 구상도 그런 카드 중의 하나다. 현지에서 만난 러시아 관리들은 “중국에 대한 견제 심리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 참여할 기회나 공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 러 소비자 입맛 사로잡은 초코파이-밀키스 ▼
극동시장 누비는 한국기업들… 서방기업 고전속 탄탄한 성과
롯데, 음료수 시장점유율 80% 넘어… 포스코, 불황에도 철강 수출 늘려
요즘 러시아 극동은 기업인들 사이에서 ‘얼음이 녹는 빙하’에 비유된다. 규제가 풀리면서 수많은 외국기업과 투자자들이 몰려가고 있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크레바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만난 외국기업 임직원 대부분은 창고에 쌓아둔 상품을 챙기거나 귀국 채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22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만난 독일인 톰 벤 데어 린데 씨는 “저유가와 루블화 평가절하에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까지 겹쳐 러시아 극동 시장도 외국기업의 ‘무덤’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 롯데, 포스코, 현대상선 등 한국 기업들은 투자하며 수익을 늘리고 있어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10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 쇼핑몰을 찾았을 때 롯데칠성음료가 현지에 내놓은 탄산음료 밀키스와 캔커피 레쓰비를 사가는 러시아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초등학생 마리나 이바노비차는 “밀키스는 우유가 들어 있어 맛있다. 학교를 마치면 매일 사 마신다”고 말했다. 밀키스는 2014년 한 해 동안 러시아 시장에서 1320만 달러(약 147억 원)어치가 팔렸다. 이곳의 밀키스는 현지인의 입맛에 맞춰 11가지 맛을 낸다. 레쓰비도 러시아 국민 캔 커피로 자리 잡았다. 밀키스와 레쓰비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모두 80%가 넘는다.
롯데는 극동에서 소비자 친화적인 제품을 수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륙에서는 롯데호텔 모스크바점 개설 이후 브랜드 확산 효과도 보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롯데호텔이 러시아에서 안착한 뒤 브랜드 인지도가 확산되면서 초코파이와 같은 제과 제품 수출도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롯데는 극동과 모스크바를 거점으로 삼아 카자흐스탄의 1위 제과업체인 라하트를 인수하고, 우즈베키스탄의 수르길 가스전을 개발하고 있다.
남북한과 러시아가 추진하는 나진-하산 프로젝트에서 합자 사업자로 참여하고 포스코는 장기적인 접근 전략이 뛰어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포스코는 러시아가 불황기를 맞고 있지만 상품 수출을 늘릴 계획이다. 이 회사는 장기 전략투자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조선소에 선박용 후판을 팔아왔다. 이 조선소는 소련 시절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수상함과 잠수함을 수리해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는 러시아의 전략 기업으로 지정돼 1000t급 상선을 제조하는 회사로 변신했다. 포스코가 이 조선소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사를 두고 나진-하산 투자프로젝트를 계기로 러시아 고위층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이석배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살아남은 기업들은 극동을 발판으로 삼아 유라시아 철도를 타고 수천 km 떨어진 옛 소련 위성 국가 곳곳에다 상품을 뿌릴 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후광 효과를 얻으면 성공 확률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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