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세력 바꾸자” 앵그리 아메리칸이 움직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3일 03시 00분


[2016 美대선 아이오와 이변]민주 샌더스, 힐러리와 박빙

“오 마이 갓, 우리가 힐러리와 이런 싸움을 하다니….”

1일(현지 시간) 오후 9시 반 미국 아이오와 주 디모인의 홀리데이인호텔 대회의장. CNN의 민주당 개표 결과가 나오자 1000여 명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75) 지지자들은 댄스 음악에 몸을 흔들며 파티를 시작했다. 흥분한 나머지 곳곳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좀처럼 웃지 않던 샌더스도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구겨진 양복은 살인적인 유세 일정에 헝클어져 있었다. 백발은 듬성듬성했지만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그는 “힐러리와 사실상 비겼다. 아이오와가 오늘 밤 미국을 바꾸기 위한 정치 혁명을 드디어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이어 “부자들만을 위한 정치는 어떻게 한다고?”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지지자들은 “이제 그만(Enough is Enough)!”이라고 대답했다. 샌더스의 핵심 슬로건이다.

무소속으로 시작해 지난해 11월 뒤늦게 민주당에 입당한 샌더스. 그는 워싱턴 기성 정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기적 같은 선전은 우직할 정도로 개혁의 메시지를 전파한 덕분이다. 그는 모든 유세에서 “워싱턴을 바꾸자” “정치 혁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단조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지지자 클리프 세일 씨는 “샌더스는 30여 년 전 정치를 시작한 후 정책과 이슈에 대해 말을 바꾼 적이 없다. 그것만 봐도 힐러리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세상을 바꿀 열정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브랜드를 창출해냈다. 최고령 후보지만 어딜 가나 ‘열정’이란 키워드를 정치 개혁 공약과 엮어냈다. 화려한 국정 경험을 내세우지만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불분명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9)하고는 뚜렷이 대비됐다. 샌더스는 거액의 정치 자금을 굴리는 ‘슈퍼팩’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소액의 개미들과 자원봉사자를 주축으로 한 풀뿌리 조직으로 민심의 밑바닥을 훑어왔다.

이날 선전에도 불구하고 샌더스의 열정이 클린턴의 대세론을 꺾을지는 아직은 불투명하다. 제대로 된 국정 경험이 없다는 게 큰 약점이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은 최근 샌더스의 ‘월스트리트 해체’ 주장에 “국정 전반에 대한 통찰력과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론조사에서 전국 단위 지지율이 여전히 클린턴에게 뒤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지난달 27일 ABC방송과 워싱턴포스트가 전국 민주당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합동 여론조사에서 클린턴은 55%, 샌더스는 36%를 얻었다. 아이오와 코커스와는 거리가 있는 결과다.

▼ 공화 크루즈, 트럼프에 역전 ▼

“아이오와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공화당 대선 후보는, 그리고 차기 미국 대통령은 미디어가 선출하지도 워싱턴 주류가 뽑지도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1일 아이오와 코커스 개표 결과를 지켜보던 공화당 대선 주자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46)은 1등이 확실해지자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막말 세례로 언론의 관심을 차지하며 선거판을 주물러 온 도널드 트럼프(70)와 자신을 홀대한 미 언론을 향해 날린 ‘한방’이다.

승리 축하 파티가 벌어진 디모인 시내 한 체육관에서는 5인조 밴드의 축하 연주에 지지자들이 춤판을 벌였다. 열렬한 환호성 속에 등장한 크루즈는 연단 위의 가족과 차례로 포옹했다. 그의 눈가엔 눈물이 보였다.

크루즈는 투표 당일까지 점퍼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아이오와 주의 모든 카운티를 샅샅이 훑었다. 99개 카운티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유세에 나선 후보는 공화 민주 통틀어 크루즈가 유일했다. 트럼프가 전용기로 폼 잡으며 언론을 활용한 공중전을 벌일 때 그는 밑바닥 표를 긁어모았다. 1일 발표된 퀴니피액대 여론조사에서 트럼프(31%)에게 7%포인트나 뒤졌지만 득표 결과는 달랐던 게 ‘크루즈식 백병전’의 힘이다. 아이오와 주 유권자들의 보수 기독교 성향도 크루즈에게는 우군이다. 쿠바계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크루즈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교회를 누볐다.

크루즈는 공화당 내에서 대표적인 강경 보수파로 꼽힌다.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한 지 3년밖에 안 되는 풋내기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정치적으로 성장해 왔다. 2013년 상원에서 건강보험 개혁안인 ‘오바마 케어’에 반대하며 21시간 동안 연설했다. 이런 모습은 미국인들이 ‘크루즈’ 하면 바로 떠올리는 장면이다.

‘꼴통 보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경파여서 당 지도부의 거부감도 있지만 ‘트럼프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는 기류가 힘이 됐다. 1일 투표에 앞서 어번데일고교에서 열린 공화당원 토론회에서는 “트럼프로는 정권을 찾아올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모욕적인 후보다” “크루즈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만이 백악관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의견이 오갔다.

무엇보다 크루즈는 이번 승리를 통해 자신의 출생 논란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게 됐다. 스페인계 혈통의 쿠바인 부친,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피가 섞인 미국인 모친을 둔 크루즈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태어났다. 트럼프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헌법 규정을 들이대며 거세게 공격해 왔다. 하지만 아이오와는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며 ‘면책’을 해 줬다.

관심은 9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경선)다. 최근 뉴햄프셔 여론조사에서 크루즈는 트럼프에게 큰 격차로 뒤지고 있지만 아이오와에서의 승리로 트럼프 거품론과 크루즈의 대안론이 힘을 얻으면 격차가 좁아질 수 있다.

크루즈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최종 지명받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어젠다가 없는 반대론자’라는 비판을 넘어서야 한다. 경제 안보 등 미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분야에서 크루즈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테러 이후 확실한 보수 행보로 급부상한 만큼 남은 경선에서 크루즈 거품론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디모인=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디모인=박정훈 특파원 sunshade@donga.com
#미국#대선#샌더스#힐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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