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케치]해밀턴 vs 제퍼슨… 게이츠 vs 잡스… 뮤지컬 무대서 재대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5일 03시 00분


美 브로드웨이 달구는 라이벌 열전

《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과 초대 국무장관이자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건국의 아버지들이자 정치사의 최대 라이벌이다. 해밀턴은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했고 질서를 중시한 반면 제퍼슨은 독재를 두려워하며 자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각각 현 공화당과 민주당의 시조(始祖)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빌 게이츠(1955∼)와 애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 역시 정보기술(IT) 분야의 거성(巨星)이자 최대 경쟁자였다. 1955년생 동갑내기이기도 하다. 미국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는 요즘 ‘18세기 건국 라이벌’ 대 ‘21세기 IT 라이벌’의 스토리를 담은 두 뮤지컬이 맞붙으면서 흥분으로 차 있다. 해밀턴과 제퍼슨의 일대기가 담긴 뮤지컬 ‘해밀턴’이 인기를 얻고 있는 가운데 4월 1일 잡스와 게이츠의 ‘30년 경쟁’을 소재로 한 뮤지컬 ‘너즈(Nerds·범생이들)’도 막을 올린다. 두 뮤지컬은 걸어서 2분도 채 안 되는, 두 블록 떨어진 극장에서 서로 경쟁한다. 》

미국 공화-민주 양당의 정치적 시조이자 미국 정치사의 최대 라이벌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해밀턴’. 정가의 4∼5배로 암표가 팔리고 위조 표 피해까지 발생할 정도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 출처 해밀턴브로드웨이닷컴
미국 공화-민주 양당의 정치적 시조이자 미국 정치사의 최대 라이벌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해밀턴’. 정가의 4∼5배로 암표가 팔리고 위조 표 피해까지 발생할 정도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 출처 해밀턴브로드웨이닷컴
美 건국영웅 다룬 ‘해밀턴’ 돌풍

뮤지컬 ‘해밀턴’ 공연장인 리처드 로저스 극장은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바로 옆 46번가에 있다. 공연이 없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이 극장 앞엔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이른바 ‘취소(canceled) 표’를 노리는 사람들이다. 표를 샀다가 사정상 공연을 볼 수 없게 돼 환불된 표가 나오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표가 나오면 선착순으로 재판매하기 때문에 저녁 공연 ‘취소 표’를 얻기 위해 아침부터 극장 앞에 기다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22일 오전 11시경. 기자가 이 극장 앞을 지날 때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영하의 날씨인데도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녀 등 10여 명이 극장 앞에서 ‘연좌 농성’하듯 찬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최소 공연 직전까지 아무런 보장 없이 7∼8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날 취소 표가 없으면 하루를 완전히 허탕 치는 셈이다.

대학생 딸과 함께 기다리던 한 백인 중년 남자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피자 한 판을 사들고 와 점심을 때웠다. 이 남자는 기자에게 “해밀턴이 너무 유명해서 꼭 보고 싶은데 10개월 치 이상이 매진돼 표를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 오늘은 하루 휴가를 내고 작심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인터넷 개인거래 사이트에선 177달러(약 22만 원)짜리 1층 오케스트라석 표가 800∼1000달러에 팔린다.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표를 살 형편은 못 된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1월 하순 “뮤지컬 해밀턴 열풍이 식을 줄 모르면서 정가의 4∼5배에 달하는 암표가 기승을 부리더니 마침내 위조 표까지 등장했다. 개인 간 거래를 통해 그런 표를 구입했다가 공연도 못 보고 큰돈만 날리는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CNN도 최근 ‘왜 우리는 해밀턴에 이토록 열광하는가’라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이유로는 딱딱한 역사 이야기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힙합과 랩 음악으로 재미있게 풀어냈고, 흑인과 히스패닉 배우들이 건국의 아버지들을 연기한 점도 시대적 다양성에 부합했다는 점을 꼽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이 그려내는 ‘선의의 경쟁’ 구도가 극의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브로드웨이 대형 프로덕션 중 하나인 ‘슈버트사’의 제러드 푸니어 판매담당 매니저는 “정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경쟁자가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며 ‘내 조국’ 미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관객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진보 성향인) 나와 강경 보수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유일한 공통점은 뮤지컬 ‘해밀턴’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진보-보수, 민주당-공화당의 정파적 이해를 초월하는 ‘애국주의적 두 영웅’의 모습에 감명받았다는 얘기다.

미 국무부가 발간한 ‘미국 역사의 개요’란 책엔 ‘해밀턴 대 제퍼슨’ 항목으로 두 건국 영웅의 철학적 차이를 상세히 소개돼 있다. 그러면서 “(건국 당시) 미국엔 두 사람 모두가 필요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고 그 둘의 철학을 (건국이념에) 섞을 수 있었던 건 미국의 행운”이라고 적었다.

동북부 대도시와 상인층의 이익을 대변한 연방주의자 해밀턴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구했지만 시골과 남부지역을 대표했던 반(反)연방주의자 제퍼슨은 주정부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둘은 사사건건 부딪쳤고 뮤지컬 ‘해밀턴’은 이 장면을 경쾌한 랩 배틀로 담아냈다. 미 언론들은 이를 “이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라고 입을 모은다.

▽워싱턴=국무회의 시작할 준비됐나요. 연방정부가 (국민의 지지와 믿음을 확보하기 위해) 주정부의 부채까지 떠안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중앙은행을 만들어야 한다는 해밀턴 재무장관의 계획안을 논의합시다.

▽제퍼슨=왜 뉴욕의 빚을 (내 고향) 버지니아도 같이 물어줘야 하죠? 해밀턴 계획은 말도 안 돼요. 그리고 젠장, 너무 방대해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요.

▽해밀턴=제퍼슨, 말은 참 잘하네요. 하지만 꿈 깨고 현실을 좀 보자고요. 우리는 지금 현실 세계의 진짜 나라를 경영하고 있다고요. 연방정부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죠.

▽워싱턴=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를 도와야 하나요, 아니면 당분간 지켜봐야 하나요.

▽제퍼슨=그들(프랑스)이 전제국가(영국)에 맞서고 있는데 자유를 위해 싸워온 우리(미국)가 그들 곁에 당연히 있어야죠.

▽해밀턴=미국이 이 세상 모든 혁명(전쟁)에 개입하면 끝이 없어요.

▽워싱턴=그래, 해밀턴 말이 맞아. 우리가 새로운 싸움에 끼어들 형편이 아니지.

▽제퍼슨=해밀턴, 당신은 정말 워싱턴(대통령)의 뜻대로만 하는군요. (워싱턴이 ‘해밀턴’을 호명하자) 당신 아빠(daddy)가 부르네요.

해밀턴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워싱턴의 부관이었고 정부 수립 후 초대 재무장관으로 워싱턴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그러나 ‘영원한 라이벌’ 제퍼슨은 나중에 제3대 대통령이 됐지만 해밀턴은 정적(政敵)이던 당시 부통령 에런 버와 권총 결투 끝에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NYT는 “그런 해밀턴을 ‘뮤지컬 해밀턴’이 완전히 부활시켰다. 10여 년 전에 출간됐던 해밀턴 전기가 뮤지컬 열풍으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진정한 영웅’으로 재조명되고 있다”고 전했다.

정보기술(IT) 분야의 최대 경쟁자였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와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 창업자의 ‘30년 전쟁’ 이야기를 코믹하게 표현한 뮤지컬 ‘너즈(Nerds)’. ‘21세기 대표 라이벌’을 다룬 이 공연은 다음 달 1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 올해 최대 기대작이다. 사진 출처 너즈(Nerds)뮤지컬닷컴
정보기술(IT) 분야의 최대 경쟁자였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와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 창업자의 ‘30년 전쟁’ 이야기를 코믹하게 표현한 뮤지컬 ‘너즈(Nerds)’. ‘21세기 대표 라이벌’을 다룬 이 공연은 다음 달 1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 올해 최대 기대작이다. 사진 출처 너즈(Nerds)뮤지컬닷컴
▼IT거물 소재 ‘너즈’ 4월 개막▼

“나는 내 손녀들에게 학교에서 ‘너드(nerd·범생이)’랑 데이트하라고 늘 권유한다. 그 너드가 미래의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 및 최고경영자)가 될지도 모르니까.”

“할머니, 그 손녀들이 ‘너드’가 되도록 격려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다음 세대의 성공적인 발명가가 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지난달 페이스북 애용자인 미국의 한 할머니와 저커버그가 페이스북 댓글로 주고받은 대화가 ‘너드’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너드는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지만 사교성이 없는 특이한 아이, 그런 이유로 여학생들에게 인기 없는 남학생을 가리킨다.

4월 1일 맨해튼 브로드웨이 롱에이커극장(48번가) 무대에 21세기 최고의 너드이자 정보기술(IT) 분야의 최대 라이벌 2명이 오른다.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 빌 게이츠와 애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30년 경쟁 관계를 다룬 뮤지컬 ‘너즈, 뮤지컬 닷-코미디(Nerds, A Musical Dot-Comedy)’가 첫선을 보인다.

이 뮤지컬의 케이시 허션 감독은 “정말 재미있는 공연이다. 기대해도 좋다”고 말하고 공연기획사 측은 “3차원(3D) 영상을 구현하는 홀로그램을 통해 게이츠와 잡스의 실물을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뮤지컬은 두 IT 거물의 경쟁과 성장을 △20대 컴퓨터에 미친 ‘괴짜’ △30대 혁신 기업을 키운 창업가 △40대 IT 혁명가 등으로 구분하면서 구식 전축부터 최신 아이폰까지 시대별 소품을 볼거리로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뮤지컬도 ‘해밀턴’처럼 힙합과 랩 음악을 많이 사용할 것으로 전해졌다. 브로드웨이 공연 전문 예매처 오쇼(ohshow.net)의 애나 조 대표는 “‘너즈’에 대한 브로드웨이의 관심과 기대가 커지고 있다. 청소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학부모들의 문의나 예매 전화도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너즈’가 성공하면 해밀턴과 함께 ‘힙합과 랩으로 노래하는 세기의 라이벌 이야기’가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잡스의 전기 ‘스티브 잡스’를 저술한 월터 아이작슨은 “천문학에서 두 별이 중력의 상호작용 때문에 궤도가 서로 얽히는 것을 ‘연성계’라고 한다. 인류역사에서도 미국 건국기에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처럼, 두 거성 간 경쟁의식으로 한 시대가 형성되는 상황을 간간이 볼 수 있다”고 썼다. 이어 “1955년에 태어난 두 명의 대학 중퇴자가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PC시대의 첫 30년을 이끈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미 경제전문지 포천은 잡스와 게이츠의 경쟁을 ‘30년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 모두 영어로는 ‘너드’였던 건 분명한데 한국어로 표현하면 잡스는 ‘괴짜’, 게이츠는 ‘범생이’에 가깝다. 성장 환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게이츠는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컴퓨터 마니아가 됐다. 하버드대를 다니다가 중퇴한 이유도 ‘하루빨리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작슨은 “게이츠는 결코 반항아나 히피, 반(反)문화 운동의 일원이 된 적이 없다”고 적었다.

반면 잡스는 고교 시절부터 히피 문화에 빠져 있었고 마약에 손을 대기도 했다. 대학(리드대)을 중퇴한 뒤 전자게임 회사에 다니다가 인도철학에 빠져 회사를 그만두고 히피 차림으로 수개월간 인도를 여행하기도 했다.

잡스가 직관적이고 낭만적이라면 게이츠는 분석적이고 실용적이었다. 서로 닮거나, 죽이 맞는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게이츠는 잡스의 무례함을 불쾌해했고, 잡스는 ‘게이츠가 편협하다’고 비난하곤 했다. 잡스는 1996년 ‘너즈의 승리(Triumph of the Nerds)’란 PBS 프로그램에 출연해 “MS는 진짜 색깔이 없다. 그들이 성공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사람들이 3류(MS) 제품을 산다는 게 화가 난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게이츠는 이런 잡스를 향해 “기본적으로 이상하고 인간으로서 결함이 있다”라고 꼬집었다.

두 사람은 30년간 경쟁과 협력을 거듭했지만 공개 행사에 나란히 참석한 경우가 많지 않다. 2007년 한 IT 관련 세미나에 드물게 함께 참석해 좌담한 뒤 질의응답 시간까지 가졌다.

▽방청객=후세에 남길 업적 하나만 선택하라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게이츠=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PC입니다. 10대, 20대, 30대를 PC에 푹 빠져 살았으니까요. 거의 마흔 살이 다 될 때까지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요. 당신이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안엔 소프트웨어에 대한 믿음, 그 놀라움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잡스=게이츠가 ‘무덤 속 최고 부자’가 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 좋아질 거예요. 그가 번 돈으로 (살아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남길) 업적 같은 건 별로 생각 안 해요.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만 생각하죠. 그럴 수 있으면 되는 거죠.”

게이츠의 이런 ‘범생이 태도’와 잡스의 저런 ‘괴짜 근성’을 뮤지컬 ‘너즈’가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하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해밀턴#너즈#스티븐 잡스#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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