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에 은색 머리, 검은색 정장에 붉은 넥타이를 맨 노신사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다소 쉰 목소리에선 나이가 느껴졌지만 메모를 보지 않고 청중과 눈을 맞추며 30분 넘는 연설을 물 흐르듯 해냈다.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그를 ‘팬’들은 10분이 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12일 오전 미국 뉴욕 퀸스 플러싱의 무단연회장 2층 홀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70·42대)은 45대 대통령에 도전하는 아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9)을 위해 지원 유세를 했다. 19일 뉴욕 주 경선을 앞두고 아시안아메리칸태평양계연합(AAPI)이 주최한 이날 행사엔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열광했다. 그가 왜 ‘정치판의 대표적 록 스타’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 50분경 이곳이 지역구인 중국계 그레이스 멍 연방 하원의원과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연단 뒤편에서 나타나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연단에 오른 멍 의원이 “클린턴 전 대통령이 8년간(1993∼2001년) 집권할 때 미국은 정말 위대했다. 그런 미국을 다시, 그리고 더욱 위대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또 한 명의 클린턴(힐러리)’을 백악관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클린턴 전 대통령은 ‘왜 힐러리가 가장 확실한 대통령감인가’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돼야만 하는 이유는 그녀가 최고의 변화 주도자(change maker)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그녀를 지켜본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변화에 대해 말하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이뤄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무섭게 추격해 오는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75·버몬트)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여러분은 말만 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며 아내에 대한 지지를 당부했다.
아시아계 등 미국 내 소수 인종에 대한 배려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재임 기간) 여성과 소수 인종에 대한 소상공인 대출 종류를 2배로 늘렸다”며 “힐러리가 다시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부(富)를 함께 나눌 때 같이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웅변을 토하는 듯 격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조용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40분 동안 연설한 뒤 100명이 넘는 청중이 안전을 위해 쳐놓은 무대 앞 접근 금지선 앞으로 몰려갔다. 그는 악수와 사진 촬영 요구에 일일이 응하고 몇몇 지지자가 털어놓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10분 넘게 흘렀다. 힐러리 캠프의 한 관계자는 “수많은 선거를 치러본 클린턴 전 대통령은 지지자들을 위한 그런 ‘몇 분’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아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클린턴 부부는 1992년 첫 대선에서 승리한 뒤 “우리(유권자)에게 8분만 달라. 그러면 당신에게 8년(4년+4년)을 드리겠다”는 지지 문구가 가장 가슴 깊이 남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백인 경찰관 케빈 폴리 씨(22)에게 ‘아시아계 행사인데 왜 참석했느냐’고 묻자 “빌을 보러 왔다. 그는 남자로서 대통령으로서 나의 영웅이다. 힐러리와 함께 다시 백악관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힐러리가 당선되면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 최초의 ‘퍼스트 젠틀맨’이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