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선생님, 우리가 착취당하는 것도 좀 써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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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러시아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북한 노동자들. 동아일보DB
지난해 12월 러시아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북한 노동자들. 동아일보DB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취당하는 것도 좀 써주세요. 죽겠습니다.”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돼 일하는 북한 근로자였다. 오랫동안 내 칼럼을 읽어 오다가 전화할 용기를 냈다고 했다.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3000∼4000달러를 북한 가족에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고향에 돈 보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북한에 뜯기는 것이 너무 많아서란다.

해외에 파견된 북한 근로자들이 죽을 맛이라고 아우성친다는 소식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바 있다. 도대체 얼마나 뜯기는지 궁금했다.

“1년에 북한에 얼마나 내야 합니까.”

“2016년 국가계획분이 40만 루블(약 680만 원)입니다.”

국가계획분이란 해외 파견 근로자가 북한 당국에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1인당 몫이다. 해외의 북한 기업은 근로자 머릿수만큼 배정된 돈을 당국에 제일 먼저 갖다 바쳐야 한다.

“국가계획분은 매년 얼마씩 올랐습니까.”

“2008년엔 14만 루블이었습니다. 2009년에 18만 루블, 2010년 20만 루블, 2011년 24만 루블, 2012년 25만 루블, 2013년 35만 루블, 2014년 36만 루블, 2015년 38만 루블, 올해 40만 루블….”

한이 맺혀 뇌리에 박힌 숫자가 쉼 없이 줄줄 나왔다.

기가 막혔다. 올해는 2010년보다 두 배나 올랐다.

“정말 너무하네요. 그렇게 벌 수는 있는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사업소는 환율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루블로 임금을 받는데, 나라에선 과제를 달러로 내라고 합니다. 환율 부담을 몽땅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거죠.”

왜 러시아 파견 근로자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지 이해가 됐다.

요즘 환율로 볼 때 40만 루블은 대략 6000달러다. 2010년에는 20만 루블이 6000달러 정도였다. 국제 원자재 시장, 더 정확하게는 원유 가격 하락으로 러시아 루블화 환율이 크게 떨어지자 유탄을 북한 근로자들이 고스란히 맞았다.

북한 당국에 왜 근로자들의 수탈 강도를 높이느냐고 따진다면 그들은 “더 받는 것은 없다. 국가계획분은 5년 전에도 지금도 6000달러일 뿐이다”라고 변명할 것이다.

근로자 입장에선 루블화로 책정된 일당은 제자리걸음인데 예전보다 두 배나 돈을 더 내는 것이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국가계획분만 내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식비로 매달 5000루블(약 8만5000원)을 내야 하고, 러시아 이민국에 1년에 한 번 거주 등록하느라 시험을 치는데 여기에 또 5만 루블(약 85만 원) 들어갑니다. 이런저런 것을 다 내고 남는 것을 나눠 가지는데, 요샌 다들 집에 돈을 못 보냅니다. 50만 루블 넘게 벌기가 쉽지 않거든요. 우린 월급이란 것도 없어요. 매달 잡비라며 1000루블 주는데 담배 15갑을 사기도 어려워요.”

그가 근로자 실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북한 당국보다 정작 더 분통을 터뜨리는 대상은 사업소 간부들이었다. 러시아 업자의 요구를 맞추느라 노동자들은 새벽까지 자지 못하고 야간작업을 수시로 하는데, 사업소 책임자나 노동당 비서, 보위부 요원은 비싼 월세 집에서 유럽산 고급차를 타며 흥청망청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러시아 측과 얼마에 계약하고 작업을 하는지도 몰라요. 우리가 번 돈이 나라에 가는지 간부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지도 알 수가 없어요. 하긴 북한 사람은 다 도둑이 돼야 사니까 어쩔 순 없지만.”

그는 자기처럼 러시아에서 착취에 허덕이는 노동자는 4만∼5만 명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벌목공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1만 명 남짓이고 나머지는 모두 건설노동자라고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러시아에 나오면 큰돈을 벌어간다고 해서 지원자가 많았는데, 요샌 돈을 벌지 못한다고 소문이 나서 나오겠다는 사람도 없단다. 북한의 다른 해외 건설노동자들의 처지도 비슷할 것 같다. 근래 북한이 노동자를 파견한 나라치고 환율이 꼬꾸라지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

나는 예전에 북한 해외 근로자 송출을 막는 데 반대했었다.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돈을 벌 길을 열어 주고 외국도 체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해외 근로자 송출 차단에 찬성이다. 지금 북한 근로자들은 1년 내내 죽도록 일하고도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도 어려운 진짜 노예 신세다.

“그렇게 살 바에야 한국에 오시죠.”

“저는 가족 때문에 못 갑니다. 그런데 거긴 노동자 월급이 얼마예요. 예? 막노동해도 2000달러는 번다고요? 그럼 저도 반동이 될까 봐요. 근데 선생님은 독재만 끝나면 고향에 오실건가요? 아, 예, 꼭 오세요. 소원이 빨리 이뤄지길 바랍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북한 근로자#국가계획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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