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의 프리킥]구마모토 지진… 뿌리가 같은 형제의 아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2일 03시 00분


허문명 논설위원
허문명 논설위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독도나 위안부 문제처럼 우리의 민족감정을 격발시키는 뇌관 같은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인류 평화를 위해서는 민족감정이나 국가 간의 이해 중심으로 보는 국제정치학적 앵글도 필요하지만 문화인류학적 접근도 유용하다. 우리 먼 조상들도 수천 년 전 북방에서 동으로, 동으로 이주하면서 문명을 확장시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했다. 한일 관계도 이런 깊고 큰 안목으로 사실을 연구하고 인정하는 용기를 발휘할 때 공동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한일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새삼 일본과의 오랜 인연에 놀랐다. 당시 집중적으로 취재했던 지역 중 한 곳이 이번에 지진이 난 구마모토가 속해 있는 규슈였다.

규슈는 지정학적으로 도쿄보다 부산이 더 가깝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삼한시대 때부터 건너가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엔 백제, 신라 주민이 대대적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벼농사는 물론이고 불교, 문자 등 다양한 문물이 전해졌고 백제 멸망 후에는 왕족, 귀족, 학자 등 엘리트층이 대거 이주했다.

규슈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령왕 탄생지에서부터 백제왕의 전설을 되살려 고대 백제를 재현해 놓은 마을까지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우리보다 더 잘 보존하고 있었다. 일본의 학계와 정치인들은 아직도 쉬쉬하며 진실을 은폐, 호도하고 있지만 근대 들어 많은 유적이 발굴되면서 양심 있는 학자들은 일본의 국가 형성에 한반도가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달 별세한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전 교토대 교수도 그중 한 분이었다. 한일 고대교류사 연구 최고 권위자로 작가 시바 료타로 등과 1969년부터 1981년까지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발간했던 고인은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파한 우리 조상들을 ‘도래인(渡來人·물 건너온 이들)’이라고 개념화해 정착시켰다.

이번에 지진이 일어난 구마모토에도 백제의 흔적이 많다. 메이지 유신 때인 1873년 발굴된 후나야마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금(金)신발 모자 장신구, 대형 칼, 청동거울(총 92종) 등은 후일 발굴된 공주 무령왕릉이나 익산 입점리 백제고분 것들과 너무 비슷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이 유물들이 백제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데 한일의 많은 학자가 동의한다. 1300년 전 망명한 백제 귀족들의 기술로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기쿠치 성(城)에서도 2008년 백제 불상이 발견돼 일본 사회를 흥분시켰다.

‘곰 웅(熊)’자가 들어간 구마모토 한자명 ‘웅본(熊本)’도 백제의 옛 수도 웅진(熊津·공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 옛날 백제인들이 ‘웅진의 뿌리’란 뜻으로 ‘웅본’을 지명으로 정하면서 잃어버린 나라의 수도를 이곳에 다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건 아니었을까.

구마모토는 1983년 충남도와 자매결연을 맺고 3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지진 피해 복구를 지휘하고 있는 가바시마 이쿠오 지사는 2014년 방한 때 “내 몸속에도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며 “충남도민과 우리는 한 형제요, 친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상 초유의 재난 앞에서 ‘망연자실’의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을 구마모토 주민의 핏속에 우리 조상들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나라라도 재난을 겪으면 인류애 차원에서 돕는다. 백제 조상들의 후예가 사는 구마모토 주민에게 따스한 형제애를 보낸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구마모토#지진#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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