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집권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대기업들이 ‘조세 회피용 기업 이전(Corporate Inversion)’을 시도할 때마다 “비애국적 행위”라고 맹비난해왔다. 자국의 높은 법인세(미국 35%)를 피하기 위해 법인세가 낮은 나라의 회사와 인수합병(M&A)한 뒤 본사를 그 나라로 옮기는 것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공화당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보수 언론은 “이건 애국심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아니다. 경제의 문제다. 법인세를 낮추면 해결될 일”이라고 줄곧 오바마를 비판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M&A 규제나 반독점 규제를 강화하는 행정명령과 조치를 적극 발동했다. 그 결과 오바마 정부에서 M&A 포기 건수와 규모가 직전의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뿐만 아니라 빌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 때보다 크게 늘어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취임한 이후 모두 3700억 달러(약 423조 원) 규모의 M&A가 무산됐다. 이 중 100억 달러가 넘는 M&A는 모두 5건이다. 제약업체 화이자와 앨러건의 M&A(1600억 달러·약 182조4000억 원)는 재무부가 조세 회피용 기업 이전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를 내놓는 바람에 무산됐다. 2011년 T모바일을 390억 달러에 인수하려던 AT&T,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110억 달러에 사들이려 한 나스닥 모두 법무부의 반독점 관련 고소 등으로 거래가 중단됐다. 2014년 애브비도 아일랜드 샤이어를 55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가 재무부의 조세 회피 관련 세법 개정안이 고시(告示)되면서 3개월 만에 포기했다. 컴캐스트는 지난해 타임워너를 71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가 시민단체들이 브로드밴드 독점기업의 탄생에 반대하고 법무부가 이에 호응해 제동이 걸렸다. 에너지 서비스 회사인 핼리버턴이 경쟁사 베이커휴스를 250억 달러에 인수하려는 시도는 법무부의 반독점 소송으로 가로막혀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노스럽그러먼의 록히드마틴 인수 건과 MCI월드컴의 스프린트 인수 건 등 2건(총 거래규모 1370억 달러·약 156조 원)이 정부 반대로 무산됐다. 부시 행정부 때 정부 입김으로 취소된 M&A는 에코스타의 휴스일렉트로닉스 인수 1건(270억 달러·약 30조 원)이었다. 이전 정부와 비교하면 오바마 행정부가 국제적인 M&A에 대해 철퇴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월가에선 “오바마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지나치게 높은 법인세’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M&A를 시도하는 특정 기업들을 겨냥한 ‘맞춤형 제재’로 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 한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화이자와 앨러건의 M&A 무산 건이 ‘감정적 대응’의 대표 사례라고 WSJ는 보도했다.
이 같은 ‘신(新)보호무역주의’ 기조는 대선 철을 맞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뿐 아니라 공화당 선두주자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도 오바마 정부의 강경 조치에 찬성한다. 로레타 린치 법무장관은 최근 “과점이 심한 업종에서 주요 경쟁사가 합병할 경우 가격 인상, 생산량 감소, 품질 하락, 혁신 지연 등의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 경영진이 소비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이익을 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도 “소비자 이익을 저해할 수 있는 합병이나 기업행동에 대해선 ‘공격적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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