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도널드 트럼프(70)가 연일 장사꾼 같은 발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69)과 버니 샌더스(75) 간의 갈등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무소속에, 무명으로 관심 밖이던 버몬트 주의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프라이머리(예비경선)에서 혜성처럼 나타나더니 이젠 패색이 확연한데도 끝까지 버티는 똥배짱이 참 대단하다.
지난주 펜실베이니아 등 5개 주 경선에서 제일 후미진 로드아일랜드 한 곳만 달랑 건진 샌더스가 9분 능선을 넘어선 힐러리를 상대로 더 뛰어봤자 돈만 날릴 것이 뻔한데도 “못 먹어도 고(go)!”를 외쳤다. 캠프 직원에게 월급 줄 돈도 축나자 수백 명에게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2월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때만 해도 1000명이 넘던 캠프에 이제 325∼350명만 남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몸집을 줄이더라도 7월 전당대회까지 게임을 끌고 가겠다는 전략이다. ‘머니게임’으로 악명 높은 미 대선에서 멍청한 짓 같아 보이지만 샌더스는 요지부동이다.
힐러리는 4개 주에서 압승한 뒤 샌더스 지지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했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대학생들은 샌더스가 아니라면 힐러리보다 차라리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트럼프가 생쇼를 하는 것 같지만 힐러리보다 훨씬 솔직해 보인다는 것이다. 힐러리는 표만 된다면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부정직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힐러리는 온건한 공화당 사람 같다’는 수군거림도 곳곳에서 들린다.
힐러리로선 샌더스를 지지하는 중산층 이하 백인 노동자와 젊은 학생들 표를 끌어오지 못하면 트럼프를 감당하기가 간단치 않다. 샌더스가 끝까지 힐러리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골수’ 샌더스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편이 낫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보도했다. 힐러리는 2008년 흑인 대통령후보 버락 오바마의 손을 들어주며 분루를 삼켰다. 4년 후, 8년 후를 도모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복선이 깔린 마지못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8년 동안 목 빠지게 기다린 끝에 만난 적수가 차기를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일흔다섯 할아버지라니…. 샌더스는 이번이 아니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챙길 것도 없다. 8년 전 힐러리 때와는 180도 다른 상황이다. 힐러리 손을 힘껏 들어주면서 뒤로 챙길 ‘무엇’이 샌더스에겐 없다. 무소속 출신 샌더스에게 민주당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라고 하는 것도 먹혀들리 만무하다.
자칭 사회주의자(socialist) 샌더스는 민주당 대선 판을 크게 흔들어 놨다. 힐러리의 자유무역 모토를 공정무역으로 바꿔놓고 월가로부터 뒷돈을 받는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힐러리도 월가 개혁에 한목소리를 내도록 물꼬를 텄다. 최저임금 2배 인상, 대학등록금 면제 등 분배 중시의 샌더스 목소리는 한결같다. 힐러리 공약을 계속 좌클릭하기 위해선 남은 경선을 완주하고 전당대회에서 ‘샌더스의 사회주의 가치’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원(舊怨)이 풀리지 않듯 치열한 당내 경선의 후유증은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반 다름없다. 샌더스 캠프에선 최근 2005년 트럼프 재혼식 때 클린턴 부부가 참석한 이미지 사진과 함께 힐러리가 돈만 밝히는 속물임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이메일에 담아 기금모금 캠페인용으로 쫙 뿌렸다. 트럼프도 “내 재혼식 때 클린턴 부부의 참석을 ‘돈으로 샀다’”고 폭로했다. 7월 하순 열리는 전당대회 전까지 이렇게 힐러리를 계속 씹어대면 최후에 덕 볼 사람은 본선에서 힐러리 악담을 100% 중계 방송할 트럼프라는 사실이 민주당 지도부를 불안하게 만든다.
샌더스는 타운홀 미팅에서 ‘이제 힐러리를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서 ‘이거 하세요’ 하면 여러분이 내 말을 듣겠느냐”고 반문했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민초들이 주도하는 풀뿌리 운동의 대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힐러리가 샌더스 지지층을 데려가려면 대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노동자와 저소득층,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힐러리를 대선 후보로 내세워야 하는 상황에서 당내에선 상원의원인 해리 리드(네바다), 엘리자베스 워런(매사추세츠), 척 슈머(뉴욕) 같은 중진이 중재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샌더스는 자신의 공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이 노(老)정객은 오늘도 유럽식 사회주의 복지국가를 꿈꾸며 군중에게 외친다. “여러분이 바로 이 나라를 바꿀 혁명가입니다.” 샌더스 표를 끌어와야 하는 힐러리로선 복장 터질 노릇이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후보 단일화를 신줏단지 모시듯 막판 철수(retreat)를 일삼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한국 정치인들은 샌더스에게 꼭 한 수 배웠으면 좋겠다. 적어도 자신만의 정책과 올바름에 대한 소신이 뚜렷한 정치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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