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예정보다 하루 앞당긴 25일 밤 늦은 시간에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이 오키나와(沖繩)에서 발생한 미 군무원의 일본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양국의 공동 대응을 강조한 것은 이 사건 직후 일본 내 반미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신속히 차단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다.
양국 정상은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주창한 ‘핵 없는 세상’ 만들기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행, 중국의 남중국해 군사화 및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 저지에 계속 공조해 나가기로 합의하는 등 글로벌 이슈와 지역 내 이슈에서 미일 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미일 정상은 당초 미에(三重) 현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26일 정상회담을 갖고 미일동맹에 대해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을 넣을 계획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27일 예정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 방문까지 연결하면서 미일동맹을 견고하게 다진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19일 오키나와 현에서 미 군무원이 20대 일본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인들의 반미 여론이 확산되면서 이 같은 당초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당겨 오후 9시 반이라는, 이례적으로 늦은 시간에 시작한 것은 이 문제에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역사적인 히로시마 방문을 통해 미일 간 유대를 내외에 과시하려던 최종 목적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백악관과 도쿄가 핫라인을 가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회담 일정 변경은 일본에서 25일 조간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백악관은 회담 시작 8시간 전인 이날 오후 1시경 조시 어니스트 대변인을 통해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 사건에 대한 일본인들의 강한 분노를 전달하고 재발 방지책을 요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피해 여성과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고 일본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히는 등 일본 여론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미일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중국이 인공 섬을 건설하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를 포함해 중국을 견제하는 데 모아졌다. 남중국해 섬의 군사기지화를 추진 중인 중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한 것은 역내 평화를 위한 미일 동맹의 변함없는 공조를 거듭 강조한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의 올해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력히 비난하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동참을 호소했다. ‘핵 없는 세상’ 만들기와 TPP 이행에 공조하는 방안은 지난해 4월 워싱턴에서의 정상회담에서도 나왔던 내용으로 이번에 강력한 미일 공조를 거듭 재확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7일 저녁 무렵 히로시마에 도착해 평화기념공원에서 피폭자 위령탑에 헌화한다. 요미우리신문은 25일 일본 정부가 이 자리에 초청할 피폭자를 선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인 피폭자는 여러 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가 이 자리에 초청될지가 최대 관심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이 ‘희생자’로 부각될 가능성과 관련해 오바마 대통령이 어느 정도 수위로 미국 원폭 투하의 도의적 책임을 언급할지도 주목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원폭피해자위령비를 방문할지는 최종 확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한국 정부는 최근까지 미 정부에 위령비 방문을 촉구했다”며 “백악관은 ‘한국의 뜻을 충분히 확인한 만큼 최종 결정은 오바마 대통령이 할 것’이라는 태도를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도 “조율 중”이라는 것이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체류 시간이 1시간도 안 돼 행사장에서 200여 m를 이동해야 하는 한국인위령비까지 가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따로 접촉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25일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인 위령비 헌화 등과 관련해 한국 정부로부터 일본 정부에 연락이 왔다는 보고를 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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