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입만 열면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을 쏟아내는 트럼프덕에 한국의 장삼이사(張三李四)까지 미국 대선에 눈길을 준다. 재미는 있지만 걱정이 앞선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우리나라 살림이 거덜 날까 봐 노심초사하다가도, 말만 번지르르한 힐러리 클린턴을 보고 있으면 눈꼴이 시다. 미국 사람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관심은 누가 이기느냐다. 현장에서 경선을 지켜본 나도 승패가 궁금하다. 워싱턴 정가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클린턴의 승리를 점친다. “트럼프 바람이 심상치 않다”고 하면 “내기하자”고 한다. 클린턴을 꼽는 건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표 계산, 바로 수학이다.
대선 결과 예측 사이트인 ‘270towin.com’에 힌트가 있다. 11월 8일 운명을 결정하는 538명의 선거인단 중 과반인 270명 이상을 얻으면 대통령이 된다는 의미로 이름 붙인 사이트다. 이곳의 예측은 제법 과학적이다.
영호남처럼 미국도 특정 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주들이 있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18개 주가 전라도(민주당)라면, 텍사스를 비롯한 22개 주는 경상도(공화당)다. 이른바 ‘굳은자’다. 인구만큼 주별로 선거인단이 배정돼 있어 계산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10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경합주)’가 문제다. 여론조사 전화에 “옆집은 뭐래유?”라고 묻는다는 충청도처럼 표 계산이 쉽지 않다. 이 사이트의 예측모델은 과거 투표 성향에 여론조사 결과와 인종 분포를 종합해 경합주 표까지 계산한다.
현 시점에선 누가 확률이 높을까. 클린턴의 민주당은 217명, 트럼프의 공화당은 191명을 굳은자로 친다. 남은 130명 중 클린턴은 53명만 있으면 되지만 트럼프는 79명이나 필요하다. 경합주의 여론조사에서도 클린턴이 앞선다. 트럼프에게 쉽지 않은 판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한다는 도박 사이트(predictwise.com)에서도 클린턴 당선 확률은 74%나 된다. 한 달 전보다 10%포인트가량 올랐다. 수학으로는 ‘힐러리 클린턴 정부’가 들어설 공산이 큰 셈이다.
하지만 표 계산이 다 들어맞을 리 없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의석을 170석으로 예측한 많은 전문가들, 또 다른 통계 분석으로 오류를 합리화하고 있을 게 뻔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민심을 계량하는 건 쉽지 않다. 민심은 바람이다. 시대정신이라는 바람을 읽어내는 게 바로 통찰력이다.
미국은 변화를 원한다. 이번엔 더 절실하다. “어떤 변화든 환영한다”는 게 다수의 심정이다.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의 인기는 변화에 대한 갈증 그 자체다.
바람은 인력으로 거스르기 어렵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의 역모(逆謀)를 막지 못한 관상가 김내경(송강호 분)은 자신을 찾아온 한명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봐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부패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으로 세운 조선의 왕권이 시들해지는 걸 원하지 않던 민심, 그게 바로 세조의 정당성이란 얘기다.
지금 미국에 불고 있는 바람은 트럼프 몫이다. ‘트럼프 싫어 클린턴 찍는다’는 표 계산으로는 어림없다. 클린턴이 남은 5개월 사이 ‘짝퉁 오바마’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면 백악관에서 퍼져 나오는 기괴한 웃음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걸라면, 트럼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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