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의 신예 여성 정치인 조 콕스 하원의원(42)이 16일(현지 시간) 괴한의 총격 테러로 사망하자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오늘은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탄식했다.
영국에서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1990년 남부 잉글랜드에서 보수당 이언 고 의원이 집 앞에 세워둔 차량에 설치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폭탄 테러로 목숨을 잃은 이후 26년 만에 처음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문명국에서 미개국으로의 추락은 상상했던 것보다 빠르다”며 충격에 빠진 영국인들의 심정을 표현했다.
콕스 의원의 죽음으로 최고조에 달했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논쟁 열기는 삽시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영국 여야 정치권은 콕스 의원의 죽음을 계기로 영국 사회의 극심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오랜만에 초당적인 연대에 나섰다. 브렉시트 찬반 진영은 18일까지 캠페인을 재개하지 않기로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와 함께 17일 오후 콕스 의원이 사망한 버스톨을 방문해 추모 장소에 헌화했다. 영국 하원도 20일 콕스 의원 추모를 위한 특별회의를 연다. 보수당은 콕스 의원 지역구의 보궐선거 때 콕스 의원을 기리는 뜻에서 보수당 후보를 출마시키지 않기로 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사회학을 전공한 콕스 의원은 졸업 후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Oxfam)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개발도상국 빈곤과 차별 퇴치에 힘썼다. 3세, 5세 두 아이 엄마인 콕스 의원은 지난해 5월 총선에서 당선된 후 ‘시리아를 위한 초당적 의원모임’을 이끌어 왔다. 16일은 자신의 42번째 생일(22일)을 일주일 앞둔 때여서 주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콕스 의원과 함께 EU 잔류 캠페인을 이끌었던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을 돌아다녔던 그에게 반드시 피해야 했던 가장 위험한 장소는 결국 고향이었다”고 탄식했다.
콕스 의원이 지난 3개월간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극우 세력으로부터 수백 건의 협박 메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이번 사건이 브렉시트 표심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가디언은 사설에서 “콕스 의원의 죽음은 수면 밑에서 소용돌이치던 국론 분열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며 “브렉시트 찬반 진영의 어떤 유력 정치인들의 말보다 이번 투표에 더 큰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보도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건이 그동안 브렉시트 찬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10%가량의 부동표의 향방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의 동반 상승은 콕스 의원에 대한 동정심으로 EU 잔류를 택하는 영국인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6일 파운드당 1.4201달러이던 파운드화는 사건 직후 1.4221달러로 급등했다. 16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도 전날보다 0.53% 상승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베팅업체들도 이번 사건 이후 영국의 EU 잔류에 무게를 싣고 있다. 영국 최대 베팅업체 베트페어는 사건 전 ‘EU 잔류’에 돈을 건 사람이 47%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1시경 사건이 터진 후 오후 5시경에는 ‘잔류’에 돈을 건 사람이 63.7%까지 올라갔다고 밝혔다.
살해 용의자인 토머스 메어(52)의 범행 동기도 여론 향배에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살해범 메어가 범행 당시 “영국이 우선(Britain First)”이라고 세 차례 외쳤다는 목격자 진술이 나오면서 반(反)이민 운동에 동조해온 영국 극우단체 ‘브리튼 퍼스트’가 브렉시트 반대 캠페인을 펼쳐온 콕스 의원을 노린 범행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러나 ‘브리튼 퍼스트’의 지도자인 폴 골딩은 성명에서 “용의자가 말한 ‘브리튼 퍼스트’는 우리 단체 이름이 아니라 단순한 구호일 것”이라며 “콕스 의원 피살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며 우리에게도 큰 충격”이라고 말했다.
용의자인 메어는 이웃과 거의 교류가 없는 외톨이로 살아왔으며 인종차별주의와 신나치주의 성향을 보여 왔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그의 동생 스콧(49)은 메어가 “강박장애 병력이 있다”고 말했다. 메어는 나치 관련 서적 ‘나는 전쟁을 벌인다(Ich Kampfe)’를 구매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를 지지하는 극우단체 잡지를 10년 동안 구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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