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피플]“힐러리가 대통령 된다 해도 동맹국에 대한 요구 늘릴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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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일파’ 美 커티스 석좌교수가 본 대선 이후

‘지일파’인 제럴드 커티스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한 해의 절반은 일본, 절반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양국 관계를 연구해 왔다. 미국으로의 출국을 앞두고 최근 인터뷰에 응한 그는 “세계는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미국이 압도적 강국이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진단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지일파’인 제럴드 커티스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한 해의 절반은 일본, 절반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양국 관계를 연구해 왔다. 미국으로의 출국을 앞두고 최근 인터뷰에 응한 그는 “세계는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미국이 압도적 강국이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진단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지난해 4월 29일 일본 총리로는 사상 처음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단에 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희망의 동맹으로’라는 제목으로 45분 동안 연설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일본)의 행위는 아시아 국민들에게 고통을 줬다”며 “전후 일본은 이전의 대전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새겼다”고 말했다.

2013년 12월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해 미국 정부의 격노를 산 아베 총리와 미국 정부의 긴장 관계가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미흡한 사죄”였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미일 간에는 통했다. 미국은 역사 문제에 대한 아베 총리의 책임을 더이상 묻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이 있기까지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석좌교수(76)도 역할을 했다. 그는 4월 초 “아베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있다”는 글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기고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사과 요구 압박이 커졌다. 실제로 아베 총리의 사과로 이어졌다.

커티스 교수의 ‘고언(苦言)’은 당시에는 일본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아베 총리와 미일 관계를 도운 셈이 됐다. 그는 자신을 ‘지일파(知日派)’라 자칭한다.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그를 만나 “친일파 아니냐”고 슬쩍 물었다.

“난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한다는 점에서 친일파는 아닙니다. 소통이 필요할 때 통로가 되고 객관적 시각이 필요할 때 조언을 하지요. 다행인 것은 일본이 듣기 싫은 소리라도 수용하려 노력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최근 미일 관계와 11월 미국 대선 결과가 미일 관계와 한미 관계 등 동아시아 국제 정치에 미칠 파장에 대해 물었다. 한일 관계에 대한 조언까지 인터뷰는 한 시간 반가량 이어졌다.

―일본은 버락 오바마 정권의 연장선이 될 힐러리 클린턴 정권을 기대하는 듯하다.

“조금 안이한 인식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도널드 트럼프 현상’의 배경에는 미국의 쇠퇴가 있다. 미국 사회에 관용과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런 미국의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오바마 외교의 틀을 유지하겠지만 점차 궤도 수정을 통해 동맹국에 대한 요구를 늘릴 것이다. 자유무역에 대해서도 클린턴은 이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반대하고 있다. 설사 TPP가 미 의회를 통과한다 해도 다른 자유무역협정은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보호무역 쪽으로 선회할 것이다.”

―트럼프가 되든 클린턴이 되든 동맹국의 부담 증가는 불가피하다는 뜻인가.

“트럼프의 ‘동맹국 안보 무임승차론’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무용론’도 결국 돈 문제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한 아시아 재균형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 부담을 동맹국에 일부 넘기는 것이다. 큰 흐름이 그렇다.”

그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 이후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한국도, 일본도 당분간 트럼프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공화당 전당대회가 끝나고 대선 본선이 시작되면 당내 외교전문가들이 트럼프 진영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때 아시아를 잘 아는 사람을 파악해 접촉해야 합니다.”

―트럼프의 외교 참모가 누구인지 윤곽이 보이나.

“아직 잘 안 보인다. 3월 공화당 외교전문가 120명이 트럼프를 비난하는 공개서한에 서명했다. 트럼프가 유력해진다면 그들 중 몇 명은 트럼프에게 줄 설 것이다. 정권에 들어가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건 그들의 본능이다. 사람은 많다. 그때 충분히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에서 중국의 패권주의가 눈에 띈다.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한가.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중국은 나라 덩치와 경제력에 맞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을 것이다. 미국 정부 내에도 중국을 봉쇄해야 한다는 견해가 상당수 있다. 하지만 봉쇄는 불가능하다. 중국은 세계 경제의 주요 플레이어다. 중요한 것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중국에 역할을 주고 끊임없이 세계 질서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우위를 지속할 수는 있을까.

“아시아 재균형은 중국이 점점 강해지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냉전시대 양극 체제가 아닌, 유동적이고 다극적인 체제하에서 미국이 아시아의 리더로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동맹국의 힘을 요청하는 것이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동남아 각국과의 관계가 모두 중요하다. 어찌됐건 과거에는 압도적 강국인 미국의 리더십을 따라가면 안보와 성장이 보장됐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저물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유동적이다. 한국도 일본도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밀고나가야 할 대외 정책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꼽았다.

“미국 일본에서 한때 한국에 대해 ‘중국 경사(傾斜)’라며 불신감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미 관계를 중시하되 중국을 끌어내기 위한 친중 정책도 동시에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 중국이 북한 문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워싱턴에서 한국 외교를 어떻게 평가하나.

“그간 가장 신경 쓴 것은 한일 관계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덜컹댄 것이다. 지난해 말 합의로 정리됐으니 안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이 불만도 토로한다.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해 시비를 붙는 듯한 태도에는 깜짝깜짝 놀란다. 이건 미국과 일본 사이의 행사였다. 7년간 양국 간에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그 와중에 한국인 위령비에도 참배하라는 요구는 방문의 의미를 근본부터 바꾸라는 얘기가 된다. 식민지로서 이중의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조금 무리한 주문이었다. 역사를 잊는 건 어렵지만 극복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이런 말 하는 게 조심스럽지만…”이라면서도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도 한국인들이 언제까지나 일본에 대한 식민지 피해 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작심한 듯 말했다.

“히로시마에서는 어린아이도, 노인도 오바마를 환영했다. 아픈 역사도 있었지만 전후 70년간 양국이 쌓은 우정과 노력이 크고 미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타협일까, 성숙일까. 한국인들에게는 전후 70년 세월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인 입장에서는 ‘그만 됐다(enough)’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는 “워싱턴에서는 지난해 말 위안부 합의로 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고 있다. 나머지는 한일 간에 풀어야 할 문제이고 그 갈등이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주는 것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국익과 미래를 생각하며 양국 관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日, 외국인 청년 年 5000명씩 30년째 불러들여 ‘외교 투자’▼

미국의 일본通… 그들은 어떻게 지일파가 되었나

 

제럴드 커티스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20대 학생 시절 1년 동안 규슈 오이타 현 벳푸에서 살며 국회의원 선거 과정을 체험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2009년 하마다 히로시 벳푸 시장(왼쪽)으로부터 벳푸 시 명예특별시민증을 받은 모습. 아사히신문 제공
제럴드 커티스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20대 학생 시절 1년 동안 규슈 오이타 현 벳푸에서 살며 국회의원 선거 과정을 체험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2009년 하마다 히로시 벳푸 시장(왼쪽)으로부터 벳푸 시 명예특별시민증을 받은 모습. 아사히신문 제공
도쿄(東京)에서 일하다 보면 미국과 일본 정부의 긴밀함에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 방문을 전후해 보인 양국 간의 호흡 일치는 ‘일심동체(一心同體)’ 수준이었다. 오바마 정권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대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안보법제 정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답했다.

이런 배경에는 우방국과 적대국, 다시 우방국으로 부침을 겪는 양국 관계 속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일본에 알리고, 또 일본의 속내를 미국에 전달해왔던 ‘지일파(知日派)’ 미국인들의 숨은 공로가 크다. 미일 양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통’인 제럴드 커티스 교수는 자신이 3세대라고 말한다.

1세대는 전전(戰前)에 선교사 자녀로서 일본을 경험한 세대로 에드윈 라이샤워 전 주일 미대사, 미 국무부 소속으로 대일 점령 정책을 입안한 휴 보턴 등이 대표적이다. 2세대는 일본과 적이 돼 태평양전쟁을 경험했던 세대다. 도널드 킨 컬럼비아대 교수, 일본문학 번역가이자 외교관이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허버트 패싱 컬럼비아대 교수 등은 모두 미 육해군 일본어학교 출신이다.

3세대는 커티스 교수처럼 ‘호기심’으로 일본을 공부한 전후세대다. 그는 “1960, 70년대 미국은 지역 연구를 중시했다.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 등은 적극적으로 일본 전문가를 육성하려는 미국 정부와 재단의 지원으로 많은 인재를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대인 1964년 처음 일본 땅을 밟은 이후 50여 년간 1년의 절반은 도쿄에서, 절반은 뉴욕에서 살며 미일 관계를 연구해왔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는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을 지내며 미일 관계 민간 회의인 ‘시모다(下田) 회의’를 주관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정치인 대부분이 일본이란 나라를 모르던 때였다. 시모다 회의는 이들을 일본에 초대하고 양국 간 인맥을 엮어 주는 소통로 구실을 했다. 십수 년간 회의를 통해 일본에 다녀간 미국 정치인은 100여 명에 이른다.

“여러 우연이 겹쳐 자발적으로 지일파가 돼 갔다. 대학에 진학할 때는 음악도였지만 우연히 배운 일본어에 재미를 느꼈다. 서양인들에게 넘지 못할 ‘장벽’인 한자가 재미있었다. 마침 존 F 케네디 정권에서 소수 언어 공부를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대학을 옮기고 교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고 일본어를 공부하러 일본에 오게 됐다.”

그를 키워낸 일본인들의 숨은 공도 크다. 그는 “정치인부터 식당 주인, 목욕탕 아줌마까지 따뜻하게 맞이해줬다. 그 따뜻함에 매료된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온 것 같다”고 말했다. 1966년 정치학도로 진로를 바꾼 뒤 ‘근사한 논문’을 쓰고 싶었던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인물은 40대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였다. 그의 소개로 규슈 오이타(大分) 현 벳푸(別府)의 신예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어 1년간 현지에서 살며 전 과정을 체험한 뒤 ‘일본 국회의원의 탄생’이란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전후 일본은 외교 정책의 제1 목표를 자유 진영의 최강대국인 미국과의 공조에 두고 정부와 민간이 나서 미국 내 지일파 만들기에 나섰다. 세계적인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미 하버드대 명예교수(86),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첫 국가정보국(ONI) 국장을 지낸 데니스 블레어 사사카와평화재단 이사장 등이 미국 내 지일파를 통칭하는 ‘국화클럽’ 멤버라 할 수 있다.

호기심을 넘어 직업을 위해 일본을 배우는 4세대, 5세대 지일파 그룹을 만들기 위한 일본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87년부터 ‘JET프로그램’을 운영해 많을 때는 연간 5000여 명의 외국인 청년을 일본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JET는 지방 초중고교의 외국어지도강사나 관청 등의 국제교류 업무 담당으로 외국 청년을 1, 2년간 고용하는 제도다.

커티스 교수는 “컬럼비아대 석사과정에서 일본 관련 수업을 듣는 학생에 JET 출신이 많다. 새로운 지일파가 생겨나는 것”이라며 “한국도 미래를 위해 세계의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아베 신조#제럴드 커티스#버락 오바마#힐러리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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