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엘리트가 이끈 세계화, 신자유주의는 승자와 패자를 낳았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이런 질서에 신물이 난 영국의 민심을 보여준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5일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대해 “엘리트 정치인과 관료주의에 염증을 느낀 대중의 분노가 표출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주류 정치인들은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며 통합과 개방의 역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경제난과 빈부 격차, 일자리 상실 등 위기만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민심이 돌아섰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지도부가 외치는 구호는 ‘더 큰 유럽(more Europe)’이다. 유럽 대륙을 하나로 묶어 인적 물적 자원이 활발하게 교류된다면 회원국이 경제 정치 안보 등 모든 면에서 시너지 효과를 얻어 번영을 누릴 것이라는 구상이다. 하지만 장벽을 허문 유럽 대륙에선 이주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개방과 통합의 결과로 얻은 건 번영이 아니라 오히려 빈부 격차만 커질 뿐이었다. 여기다 EU의 난민 수용정책으로 사회가 불안해졌다고 여기는 이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EU는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프로젝트로 EU 결성 과정에서 대중의 요구는 무시됐다고 NYT는 평가했다. 유로 도입 당시 단일화폐 체계의 비효율을 지적하는 반대파의 목소리도 만만찮았지만 영국을 제외한 EU 국가는 동일 화폐를 쓰기로 결론 내렸다. EU를 관통하는 조약을 만들 때마다 ‘일반 시민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는 요구가 묵살돼 민주적 절차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헤이르트 빌더르스 네덜란드 자유당 당수는 “EU는 우리에게서 돈, 정체성, 민주주의, 주권을 강탈해 갔다”며 “비민주적이고 믿을 수 없는 관료들이 우리를 통치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독일 마셜펀드의 정치평론가 한스 쿤드나니 씨는 “EU는 시작부터 잘못된 덫과 같다. 유일한 해결책은 역사의 방향을 뒤로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엘리트 중심의 세계화 역사를 뒤로 돌리고 싶은 민심은 ‘반(反)개방, 반통합’의 공약을 내세운 극우 정치인에게 기울고 있다. 오스트리아 대선에서는 극우 성향의 자유당이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독일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라는 극우 성향 신생 정당이 3월 총선에서 제3당 자리를 꿰찼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열풍은 말할 것도 없다.
유럽 통합을 이끌었던 기성 정치 엘리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엘리트가 예전처럼 EU의 선봉에 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이탈리아 정치잡지 ‘라임스’의 루시오 카라치올로 편집장은 “EU의 주요국인 독일조차 내년 대선을 의식해 쪼개진 EU를 다시 합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은 미국 등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공통 정서”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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