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의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는 외교정책을 만드는 정치가를 ‘고대 연극의 영웅’과도 같다고 했다.
종종 예언자와 같은 운명을 겪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장래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동족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도 없고, 그 ‘진실’을 확인시켜 줄 수도 없다는 점에서 자기 나라에서 영예를 얻지 못하고, 자신의 계획에 국내적으로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곤란을 겪으며, 그들의 위대함은 직감이 현실화된 뒤에 돌이켜볼 때에만 드러난다는 점에서다.
키신저가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쓴 책 ‘회복된 세계’(북앤피플)에서 언급한 이 대목은 마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파장의 실체를 보여주는 듯하다. 키신저의 혜안(慧眼)은 책의 마지막 장인 ‘경세의 본질’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한 나라의 국내적 경험은 국제 문제를 이행하는 데 장애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며 “국내 정책의 추진력은 직접적인 사회 경험인 반면에, 외교 정책의 추진력은 실재적인 경험이 아니라 정치가가 그 실현을 회피하고자 하는 잠재적 경험, 즉 전쟁의 위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국인들이 브렉시트 이후에나 투표의 위력을 체감하고 혼란에 빠진 것은 잠재적 경험의 영역에 있는 외교가 현실 영역의 국내 정치와 뒤섞인 결과일 것이다.
국제사회는 냉정하다. EU는 이젠 영국에 완전히 등을 돌린 모습이다. 국제신용평가 회사들은 영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낮췄다. EU 공식 언어에서 영어를 퇴출시키려는 감정적 대응도 나온다. 브렉시트 이후 이런 국제사회 움직임은 외교적, 그리고 그 이상의 파장을 남긴다는 점에서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브렉시트는 국내 정치를 국제사회에 투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주고 있다. 이민자 급증이라는 국내 문제를 두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투표라는 도박을 택한 순간 영국 외교는 국내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에서 ‘발전’으로 인식되던 민주주의의 확장과 통합이라는 흐름이 거꾸로 갈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수학처럼 외교의 영역에도 정답이 존재한다. 하지만 ‘2+2=4’라는 산술적 정답을 두고 다수가 투표를 통해 오답이라고 밀어붙이는 일이 간혹 벌어지는 곳 또한 외교의 영역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투표가 꼭 좋은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현대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여준다.
처음은 아니지만, 동맹국들이 결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는 잔류한다고 밝혔지만 브렉시트로 경제는 물론이고 사람들 간의 마음이 멀어진 동맹이 얼마나 견고하게 유지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키신저가 들여다본 1812년부터 10년간 유럽의 정치사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복잡한 외교로 새 질서를 만들던 시절이다. 전후 국제 질서의 역주행이란 이름이 붙은 브렉시트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요구하는 출발점일 수도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에도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접근법이 절실하다. 북핵 봉쇄 및 대북 제재만 내세우고, 이를 자화자찬하는 홍보 외교로는 북한의 변화 이후를 이끌기 어렵다. 안정성만을 추구하는 관료주의적 외교보다는 고대 연극의 영웅 같은 고뇌에 찬 접근법만이 변혁기의 파고를 넘게 해줄 것이다. 한국 외교정책 입안가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도 키신저의 언급일 듯하다. “심오한 정책은 부단한 창조와 상시적인 목표의 수정이 가능할 때 잘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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