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에게 승리를”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한 이집트 여성이 혁명기념일인 6월 30일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CC’가 새겨진 이집트 국기를 몸에 두르고 손으론 승리(Victory)를 뜻하는 ‘V’자를 표시하고 있다. CC는 군부
출신인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을 뜻한다(맨 위쪽 사진). 맨 아래쪽 사진은 같은 시간 한 남성이 시시 대통령의 대형 사진이 걸린 건물에서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대통령 지지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 카이로=조동주 특파원 djc@donga.com·AP=뉴시스
조동주 특파원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이집트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압둘팟타흐 시시 군사 정권이 지정한 혁명기념일을 맞아 군부 지지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무함마드 메드하트 씨(34)는 기자에게 “군부 독재라도 좋다. 경제만 살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타흐리르 광장은 2011년 1월 ‘30년 군부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아랍의 봄’ 혁명 열기가 이집트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민주화의 성지로 불려왔다. 하지만 5년여가 흐른 현재 민주화 열기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군중은 ‘민주주의보단 먹을 것이 우선’이라며 친군부 정권 대열에 서 있었다. 사회경제적 안정에 대한 열망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집트는 지난 5년간 두 차례 민중 봉기로 ‘군부→민간인→군부’ 정권을 오가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이집트 최초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는 배고픔을 해결해 달라는 국민의 요구에 무능을 드러낸 채 2013년 7월 군부 쿠데타로 물러났다. 이후 군부 출신인 시시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다.
이날 오후 7시경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집트 국기를 치켜든 친정부 시위자들이 광장에 속속 모였다. 무슬림이 인구의 90%인 이집트는 요즘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하는 라마단 기간이라 저녁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라마단 금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확성기 방송이 광장에 울려 퍼지자마자 군중은 일제히 1.5L짜리 플라스틱 생수통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열성적인 지지자 일부는 시시 대통령의 이름 발음을 본뜬 ‘CC’라는 글자를 새긴 이집트 국기와 시시 대통령 사진이 박힌 현수막을 들고 광장을 활보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양손으로 승리(Victory)를 뜻하는 ‘V’나 시시를 상징하는 ‘CC’ 모양을 만들었다. 광장 앞 건물에는 이집트 국기와 ‘이집트여 영원하라’라는 뜻의 아랍어 글씨가 레이저로 아로새겨졌다. 오후 4시경 4대 혹은 8대씩 짝지은 전투기 편대가 이집트 국기 색깔인 빨강 하양 검정 연기를 하늘에 수놓는 등 수도 카이로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 시위에 나선 이집트인들은 민주화 열망을 안고 2012년 6월 출범한 무르시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털어놨다. 이집트 명문대인 아메리칸카이로대를 졸업한 메드하트 씨는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경제적 무능함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념적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무르시 정권에 환멸을 느꼈다”고 말했다. 1년 만에 민중 봉기로 쫓겨난 ‘배고픈 민주화’의 후유증이 그의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르시 전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2012년 6월∼2013년 7월)에는 전력 부족으로 하루에 8번씩 정전되고 주유소에 기름이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성향의 무르시가 2013년 6월 “시리아 정부와 단교하고 시리아 반군을 돕겠다”며 혼돈스러운 중동에 군사 개입을 할 뜻을 내비치자 국민적 반감은 더욱 커져 갔다. 이집트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할 경우 나라가 재건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시시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군부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선 침체된 경제를 살리는 게 지상 과제다. 2018년 치러질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할지도 경제가 살아나느냐에 달려 있다.
시시 대통령은 ‘이집트의 박정희’가 되기 위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한국어에 능통한 한국 전문가 에즈딘 엘하산(49)은 “군부를 비롯한 사회 지도층 사이에선 새마을운동 배우기가 열풍”이라며 “최근 찾아간 대학교수 책상에 한국의 새마을운동 관련 저서 번역본이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시시 정권 출범 이후 사정이 나아지고 있지만 글로벌 경제 침체는 이집트의 국가 재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3대 중추사업인 수에즈 운하 통관, 중동 인력 수출, 관광 산업 모두 타격을 받으면서 극심한 달러난에 시달리고 있다. 시시 정부는 고질적인 달러 부족과 경제난 타개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집트 중앙은행은 지난달 27일 IMF로부터 구제금융 100억 달러(약 11조5000억 원)를 지원받기 위해 구조개혁에 동의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집트의 IMF 구제금융 성사는 시시 대통령이 ‘이집트의 박정희’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할 관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군부 독재에 대해 이집트인 대다수는 “경제만 발전시켜 준다면 군부라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민주화의 열망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이집트인은 “무르시 정권 때의 극심한 혼란을 수습하는 과도기적 차원에서 국민이 임시로 군부를 택한 것일 뿐 장기적으론 민주주의가 정착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잠시 에둘러 가는 것이지 이집트판 아랍의 봄은 현재 진행형이란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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