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과 사회적 불안정, 강대국 권력 전이(轉移)로 불확실성이 커지는 난세(亂世)에 여성 지도자들이 속속 구원투수로 등판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분열로 치닫는 시대에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우고 합의를 도출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통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기존 남성 중심의 정치 구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 ‘유리 천장을 뚫은 여성 지도자들은 독이 든 성배(聖杯)를 마시는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살아있는 대처’로 불리는 테리사 메이 영국 내무장관이 13일 마거릿 대처 이후 26년 만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11월 치러질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를 앞서고 있다.
2005년 총리에 오른 뒤 10년 넘게 권좌를 지키고 있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건재하고 클린턴 전 장관이 당선된다면 내년 상반기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서방 주요 3국의 지도자가 모두 여성으로 채워진다. 주요 5개국(G5) 회의에서 여성 지도자들이 남성(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을 수적으로 앞서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의 두 축을 담당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재닛 옐런 의장도 여성이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 미얀마의 사실상 1인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 등 아시아의 여풍(女風)도 거세다.
대부분 50, 60대인 이들은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1979∼1990년 재직)를 보며 지도자의 꿈을 키운 ‘대처 키즈’들이다. 1970년대 신좌파(New Left) 운동을 계기로 여성의 사회 및 정치 활동이 증가한 변화의 수혜자들이기도 하다.
블룸버그통신은 12일 최근 약진하는 여성 지도자들의 성향이 △실용적이고 △극단적으로 이념적이지 않으며 △협상을 추구한다는 세 가지 특징으로 ‘마담 프레지던트’ 현상을 설명했다. 블룸버그는 “공감 능력, 유연성, 협상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남성을 뛰어넘은 여성 정치인들의 무기”라며 “국론이 극단으로 나뉠 때, 남성 지도자들이 마치 싸움을 위한 게임장에 나온 것처럼 핏대를 세울 때 대중은 여성 지도자들을 무대 위로 불러 세운다”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분열된 영국인의 부름을 받았고, 클린턴 전 장관은 ‘마초 트럼프’의 편협함과 무례에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독일 일간지 디벨트는 3일 ‘여성 민주주의(femokratie)’란 신조어로 설명했다. 신문은 메이 총리 등을 ‘바지 정장을 입고 고무장갑을 낀 포스트모던 시대의 엘렉트라(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에 비유하면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와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등 남성들이 만들고 떠나버린 난장판에서 여성들이 뒷수습에 나섰다고 평가했다. 남성 정치인들이 망가뜨려 놓은 정치판에 새로운 피를 기대하는 유권자들의 희망이 그녀들을 부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격변기에 권력을 잡은 여성 지도자들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유리 천장을 뚫고 고위직에 오른 여성이 남성 위주의 지도층 분위기 등 새로운 한계를 만나 다시 추락한다는 게 영국 엑서터대 미셸 라이언 교수(심리학)의 ‘유리 절벽’ 이론이다. 여성은 야구에서 위기 상황에 등판한 ‘원포인트 릴리프’(한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투입하는 투수)와 같아서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남성으로 교체된다는 것이다.
라이언 교수는 9일 허핑턴포스트에 “그들이 실패한다면, 실패한 정치인이 아니라 실패한 여성으로 남게 되며 결국 남성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된다”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난세에 여성 지도자들이 맡은 역할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어서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통계적으로도 여성 지도자의 득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의회의 여성 비율이 독일 37%, 영국 29%, 미국 19%까지 늘어난 만큼 여성 지도자 탄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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