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 불러낸 에르도안의 ‘공포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9일 03시 00분


‘우리에게 죽음을 명하면 바로 실행하겠다.’

7일 터키 이스탄불 남부 예니카프 해변에서 정부 주도로 열린 ‘민주주의와 순교자를 위한 집회’에선 이런 문구가 선명하게 적힌 빨간색 터키 국기가 펄럭였다. 옆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향해 ‘당신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적힌 국기가 휘날렸다. 이날 이곳을 포함해 수도 앙카라 등 터키 전역에서 정부가 주도한 반(反)쿠데타 집회는 민주주의 수호를 목적으로 열렸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전국적으로 열린 집회에 1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또 “국회가 찬성한다면 사형제 부활을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가 가입하려 애쓰던 유럽연합(EU)과 각을 세우더라도 사형제 부활을 강행해 국내 정치를 유리하게 이끌어가겠다는 속내를 다시 한번 드러낸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다. 쿠데타 이후 비판적 태도를 보인 서방 대신 러시아를 새로운 국제관계 파트너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두 번째로 큰 군사력을 가진 터키가 쿠데타 이후 반미 감정이 커지고 친(親)러시아 행보를 이어가자 서방 세계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날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도 쿠데타 주범으로 지목된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의 송환을 요구하는 터키 국적인 수백 명이 모여 붉은색 터키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정부 주도 집회의 뜨거운 애국 열기 이면에는 최근 귈렌 지지자로 몰린 현직 교사가 체포 13일 만에 옥중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포감이 도사리고 있다. 터키 현지 매체에 따르면 교사 교칸 아시콜루 씨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3일 후인 지난달 23일 오후 11시 반경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당뇨가 심했지만 약이나 옷을 챙길 새도 없었다. 정부가 선임해준 국선변호사는 두려움에 떨며 아시콜루 씨는 물론 가족과도 일절 만나지 않았다. 아시콜루 씨의 아내가 남편에게 약을 전해주려 했지만 그마저도 불허됐다.

결국 아시콜루 씨는 유치장에 구금된 지 13일 만에 사망했다. 가족들은 특수 강화 재질로 제작된 그의 안경이 무참히 깨졌고, 팔에 멍 자국이 있는 등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고 주장했다. 터키 당국은 고문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도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다. 한 터키 교민은 “터키 주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며 “아무 근거 없이 귈렌 지지자로 몰렸다가 사망하는 일이 앞으로 계속 벌어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는 국가비상사태 이후 수감된 1만여 명이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카이로=조동주 특파원 djc@donga.com
#에르도안#터키#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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