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군속(군무원) 200여 명은 모두 굶주려 피골이 상접했는데, 일본군의 분풀이 대상처럼 보였어요. 결국 24명이 총살당했는데 탈영하거나 식량을 훔쳤다는 명목이었죠. 일본군은 다시 조선인 군속 50여 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 넣고 못 나오게 가뒀습니다. 그 와중에 10여 명이 굶어 죽었어요.”
지난달 27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현 나하(那覇) 시로부터 서쪽으로 43km 떨어진 아카(阿嘉) 섬 앞바다는 지난날 조선인의 피맺힌 절규가 무색하게 에메랄드빛으로 빛났다. 당시 일본군으로 현장을 목격한 가키노하나 부이치(垣花武一) 씨(86)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조선인 군속의 얘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무겁게 잠겨들었다. 15세이던 1945년 일본군에 징집돼 부대에 있었다는 그는 “내가 조선인 군속의 시신을 직접 묻었다”고 했다.
1945년 3∼6월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과 일본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현지인들은 이를 ‘오키나와 전쟁’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당시 군인 및 군속으로 징집된 조선인 중 약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러시아 사할린 등과 함께 강제동원 규모가 큰 지역 중 하나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오키나와 한인 강제동원 문제를 연구해 온 강제숙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추진연대회의’ 공동대표와 함께 나하 시 내 도마린 항으로부터 배를 타고 1시간 반을 들어갔다. 면적 3.8km²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작은 이 섬은 71년 전 조선인 군속으로서는 살아서 나가기 힘든 ‘지옥’이었다.
조선인 군속은 군내에서 최말단으로 ‘군부(軍夫)’라고 불렸다. 이들의 참상을 전하는 공식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가키노하나 씨나 살아남아 군속으로 겪은 지옥을 증언했던 고(故) 강인찬의 증언으로 전해질 뿐이다. 가키노하나 씨는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부분이지만 한편으로 알리고 반성해야 할 과거”라고 강조했다.
기자는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인이 총살된 ‘세키가하라(關ヶ原) 처형장’과 감금된 구덩이 등 참상의 현장을 찾아 섬 곳곳을 헤맸다. 71년 세월 속에 수풀이 우거진 그곳을 현지 주민들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우거진 수풀을 헤쳤지만 길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증언집의 지도에 나온 위치는 이제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일본군 본부가 있던 노다(野田) 산 정상의 나카다케(中岳) 전망대에 오르자 처형장과 구덩이 위치가 간신히 보였다. 세찬 바람이 한여름 더위를 삼키듯 한 차례 맹렬하게 불었다. 희생자들이 ‘우리를 잊지 말라’는 말이라도 건네는 듯했다.
희생된 이들은 그대로 묻혀 있을까.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지시로 섬 주민들이 유골을 수습해 1952년 오키나와로 보냈다. 이후 여러 곳에서 모인 유골들은 한데 모아져 화장된 뒤 몇 곳의 위령탑 등에 안치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결국 이곳에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의 행방은 알 수 없다.
2004년에야 한국과 일본 정부는 강제징집된 조선인 군인과 군속의 유골 반환 협의를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성과는 미미하다. 그 전에도 일본 정부는 한국인 사망자 유골을 가려내는 일을 사실상 방기해왔다.
지난달 26일 찾은 오키나와 남단 마부니(摩文仁) 해안에 조성된 현립 평화기념공원 내에는 ‘오키나와 전쟁’ 사망자의 이름이 가득했다. 벽의 이름은 ‘평화의 초석(平和の礎)’. 한쪽 구역에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따로 적혀 있다.
‘강맹근, 고광일, 김봉환….’ 희생자들의 명단은 불과 447명(대한민국 국적 365명, 북한 82명)에서 멈췄다. 희생자 추산치인 1만 명의 4.47%에 불과하다. 이름이 새겨진 이들 역시 거의가 유골을 찾지 못한 이들이다. 1975년 8월 우리 정부가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한국인위령탑’이 공원 한쪽에 있었지만 유난히 한적했다.
조선인 유골 봉환 등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4월부터 시행 중인 ‘전몰자의 유골 수집에 관한 법률’(유골수집법)이다. 종전 80주년을 맞는 2025년까지 수습된 전사자 유골에 대한 유전자(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사실상 유골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오키나와 현도 이 법의 시행에 맞춰 2014년 7월부터 수습 유골에 대한 화장을 중단한 상태였다. 평화기념공원 내의 ‘전몰자 유골수집 정보센터’는 2014년 전후로 보관한 690여 구의 유골 중 DNA 검사 대상이 되는 87구를 분류해 놨다. 특히 우라소에(浦添) 시 마에다(前田) 소학교 인근 현장은 후생노동성이 직접 조사하는 등 대규모 현장으로, 향후 조선인 유골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유골수집법은 일본에서 ‘우리나라(일본) 전몰자 유골’로 대상을 한정했다. DNA 검사를 한 뒤 일본인 유족 중 일치하는 사람이 없어도 조선인 등 외국인 유족과는 DNA 대조를 확인할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이다. 태평양전쟁보상추진협의회 등 한국 유족 단체들은 한반도 출신 희생자의 신원 파악을 위한 유족 DNA 검사를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일본) 정부 내부에서 적절한 대응을 검토할 것”이라는 미지근한 반응만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는 현재까지 공식적인 대응이 없다. 행정자치부 산하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에서 한국 유족 DNA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관련한 1차 예산 3억 원을 신청한 뒤 다음 달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강제숙 공동대표는 “법안은 문제점이 있지만 DNA 검사를 실시하는 등 조선인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보낼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사실상 합골 상태로 화장되기 때문에 유골들은 영영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한국 정부 차원에서 유족 데이터베이스를 빠른 시일 내에 구축하고 법 시행 관련 일본 정부의 행동에 기민하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