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한중(韓中)수교 직전, 상하이(上海)를 방문한 나는 황푸(黃浦) 강가를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헐벗은 아이는 상의도 입지 않았다. 손을 벌리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1달러짜리를 꺼낸 게 화근이었다. 정말 ‘눈 깜짝할 새’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벌떼처럼 나를 에워쌌다. 손 내밀며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밀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뿔싸, 중국 여행 시작 전 “구걸하는 아이에게 적선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말을 잊다니….
反美가 ‘親中사대주의’로
가이드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오긴 했지만, 당황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이야 ‘차이나 머니’가 세계를 호령하고 한국인들도 중국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그랬다. 2001년 1월 다시 찾은 황푸 강가. 거지는 없었고, 거리는 깨끗이 정비돼 있었다. 그해 1월 개혁·개방에 관심을 가진 북한 김정일이 상하이를 방문했고 나는 취재차 출장을 갔다.
김정일의 동선(動線)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졌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 기자는 그래도 김정일 행적을 알까 싶어 아는 중국통의 주선으로 만났다. 그런데 대화를 이어가다 김정일 얘기만 나오면 “중국과 남북한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 운운하며 말을 돌렸다. 이게 기자 맞나, 싶었다. 잘나가는 공산당원이었던 그가 초면인 내게 깊은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중국 언론이 나팔수처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말끝마다 ‘대국(大國)’을 들먹이는 걸 보면 실소가 나온다. 언제부터 먹고살게 됐다고 ‘대국 타령’인가. 중국이 큰 나라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대국’을 앞세우는 나라는 대국 자격이 없다.
중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한국에 여전히 ‘대국 놀음’을 하려 드는 것은 과거 조공을 바쳤던 나라라는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서일 게다. 우리 내부의 뿌리 깊은 친중(親中) 사대주의자들이 그 기억을 되살려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다는 사람이 중국 관영매체와 “사드 배치 결정은 박근혜 정부의 외교 실패”라는 인터뷰를 하더니, ‘사드 배치를 철회할 경우 미국과 마찰이 생겨도 중국과 손을 더 잡으면 굶어 죽을 걱정이 없다’는 궤변을 한다.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류의 세례를 받은 수구 반미·진보좌파세력이 친중 사대주의에 경도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대한민국이 이만한 번영이라도 누리게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한 한미동맹에 힘입은 바 크다. 사람 좋아 보이는 중국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의 미소에는 2009년 위구르 폭동의 무자비한 진압을 밀어붙인 칼이 숨겨져 있다. 중국의 선의(善意)에 기댔다가 여지없이 배신당한 역사적 사례는 무수히 많다.
시진핑, 무자비한 폭동 진압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이라고 달려온 명나라 군대는 한두 번 패전에 싸울 의지를 잃고 왜(倭)와의 강화(講和)에 매달렸다. 그것도 모자라 조선을 분할하거나 직할통치하려고 획책했다. 왜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군의 명령을 어겼다고 권율 장군을 잡아갔으며, 조선군 선봉장의 목에 쇠사슬을 매어 땅바닥에 끌면서 중상을 입히고 피를 토하게 했다. 다 쓰러져가던 명의 군대가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선조 임금과 중신 등 허울 좋은 ‘의명파(依明派)’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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