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8월 어느 여름날. 점심 약속이 없던 기자는 출입하던 국회 내 차량 정비소에 딸린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뒤편에서 들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당시 한나라당 수석부대변인)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2500원에 밥과 국, 3가지 반찬을 팔던 식당이었다. 손맛이 좋은 숨겨진 ‘함바 식당’이라기에 한번 가보려던 차에 이 대표를 만난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 대표는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어? 내 아지트인데. 여기 반찬이 어머니가 해주시던 것과 똑같아”라며 총각김치를 연신 베어 물었다. 기자는 그가 당 대표가 되고서도 지역구(전남 순천) 주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마을회관에서 누워 잔다는 말을 접하고 ‘소박한 것 하나는 크게 변한 게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박근혜 대통령 초청으로 11일 청와대 오찬에선 샥스핀(상어 지느러미 찜) 요리도 먹었다지만 말이다.
이 대표와 식당에서 마주친 기억이 떠오른 것은 얼마 전 미국인 K 씨와 워싱턴 시내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하면서였다. K 씨는 우리 돈으로 6000원가량 하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거 힐러리 클린턴이나 도널드 트럼프도 먹을 것 같으냐”고 했다. “대선 후보도 사람인데 샌드위치는 먹지 않을까”라고 했더니 그는 “이 맛을 알기나 하겠느냐”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K 씨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갖고 있고 최고급 이탈리아 브랜드 옷을 선호하는 이들이 서민 음식을 찾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서민 코스프레’라는 것이다. 클린턴이 멕시칸 음식인 부리토를 먹고 트럼프가 닭튀김을 먹은 것을 예로 들었다.
요즘 클린턴재단의 기부자와 국무부 간의 커넥션에다 고액 후원금 모금 논란에 시달리고 있는 민주당 후보 클린턴은 지난해 4월 대선 행보를 시작하며 아이오와 주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멕시칸 식당 체인점인 ‘치포틀레’에 들러 밀전병으로 고기와 채소를 싼 부리토를 먹은 적이 있다. 1인분에 우리 돈으로 8000원 정도 한다. 친(親)클린턴 성향인 뉴욕타임스 등은 당시 “힐러리가 중산층 이미지 행보를 했다”고 보도했다.
공화당 후보 트럼프는 1000억 원짜리 보잉 757 전용기에서 금으로 치장된 탁자에 KFC 닭튀김을 통째 놓고 먹는 사진을 이달 초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다. 트럼프는 닭튀김을 먹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는데 K 씨는 “닭튀김이 스테이크냐? 누가 포크와 나이프로 먹느냐, 손으로 들고 먹어야지”라며 그의 서민 행세를 비난했다.
대선 후보라면 이미지 만들기 차원에서 서민 행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온 기자는 이 미국인의 반응이 처음엔 좀 과하다고 느꼈다. 우리 역대 대선 후보도 선거철만 되면 재래시장에 가서 평소 먹지도 않던 길거리 음식을 먹거나 채소 값을 묻곤 했다.
하지만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클린턴과 트럼프의 표리부동을 꼬집는 평범한 백인 미국인의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역대 대선 후보들 중 최고 수준이라는 클린턴과 트럼프에 대한 미국인들의 비호감도가 얼마나 높은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쇼는 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고 연설하다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지금 두 후보처럼 거부감을 주지는 않았다”고 했다.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미 대선. 각종 논란과 진흙탕 싸움 끝에 누가 당선되더라도 더 큰 내부 갈등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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