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질서와 한반도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미국 대통령 선거가 8일로 꼭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승부인 만큼 지금도 판세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여론조사 기관이나 시점마다 다르지만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69)가 근소한 차이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70)를 앞서고 있는 정도다. 누가 백악관행 티켓을 거머쥘지 예단하기 어렵다.
몬머스대가 5일 공개한 전국 지지율 조사에선 클린턴이 44%로 트럼프(42%)를 2%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여론조사 기관 그래비스의 조사에선 클린턴과 트럼프가 44%로 같았다. 백악관 주인을 결정하는 선거인단에선 여전히 클린턴이 앞선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6일까지 집계한 결과 전체 538명(270명 이상 얻으면 승리) 중 클린턴이 237명, 트럼프가 165명을 얻었다. 하지만 경합지역 내 선거인단이 136명이나 돼 혼전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달 26일 1차 TV토론 후 클린턴이 승기를 잡는 듯하더니 부통령 후보 토론으로 분위기가 다시 달라지고 있다. 트럼프가 내세운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57)가 클린턴의 팀 케인 상원의원(58·버지니아)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미 대선 한 달을 앞두고 클린턴, 트럼프 지지자들을 직접 만나 이들이 보는 판세를 들어봤다. 동아일보와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데이터저널리즘랩 한규섭 교수 팀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8월까지 발표된 두 후보의 연설문과 1차 TV토론 속기록을 분석한 결과 클린턴은 분석력과 자신감, 트럼프는 진정성 면에서 앞섰다.
● “방심은 안돼” 굳히기 총력… “포기는 없다” 뒤집기 올인
“점심시간 전까지 세 페이지는 할 수 있겠지? 나도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하니까 그 전에는 끝내자고.”
5일 오전 10시경(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 주 레스턴의 스타벅스 커피숍. 이 지역에서 힐러리 클린턴 선거운동 자원봉사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멜라니 크레딕 씨는 뒤늦게 들어온 또 다른 자원봉사자인 돈 누보 씨에게 자료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은 클린턴 지지자들이나 부동층으로 보이는 유권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를 요청하는 ‘폰 뱅크(Phone Bank)’ 행사의 날. 민주당이 합법적으로 구매 또는 취득한 유권자 정보를 기반으로 ‘전화 유세’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스타벅스에 “커피 많이 마시겠다”며 먼저 양해를 구하고 가게 일부를 3시간가량 빌렸다. 클린턴 지지자들, 기대감 속 초조함
크레딕 씨는 속속 들어오는 10여 명의 지지자에게 “오늘은 딱 두 가지만 말하자. 빌 클린턴의 ‘오바마케어는 미친 짓’ 발언은 오해라는 것과 어제 부통령 후보 TV토론에서 민주당 팀 케인 상원의원이 잘했다는 것. 오케이?”라고 말했다. 이후 이들은 이내 가게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지지자들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인근에 사무실이 있는 에드워드 파인스타인 씨는 전화기를 붙잡고 “빌이 요즘 하도 유세를 많이 해 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폰 뱅크 행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지지자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버지니아는 케인의 지역구이고 주지사도 민주당 소속이라 클린턴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는 곳이다. 하지만 환하게 웃지는 못했다. 브라이언 주즈넥 씨는 “대선이란 게 51 대 49의 싸움이라지만 우리가 트럼프라는 멍청이를 놓고 대선 한 달 전까지 이렇게 고생할 줄은 몰랐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옆의 크레딕 씨가 “헛소리하지 마라”고 웃으며 핀잔을 줬지만 그 역시 “선거는 정말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는 힐러리의 약점(vulnerability)이 뭐냐”고 묻자 이들의 표정은 짐짓 험악해졌다. 주즈넥 씨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선거는 약점을 감추는 게임 아니냐”고 말했다. 2008년 백악관행을 거의 잡았다 놓친 클린턴이기에 2016년에도 만에 하나 그런 악몽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여전한 듯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아직은 해볼 만하다’
같은 날 오후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의 로킹엄 카운티 전시장. 전날 부통령 토론에서 민주당 케인에게 판정승을 거둔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가 유세장에 나타나자 1000여 명의 지지자들이 연신 ‘트럼프, 펜스’를 외쳤다.
이들은 여느 때보다 흥분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서부 네바다로 떠나 현장에 없었지만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기자에게 주차장에서부터 계속 클린턴 욕을 했던 짐 프레스우드 씨는 “이봐 마이크, 도널드와 함께 제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어줘, 젠장”이라며 거친 언사를 퍼부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트럼프 관련 행사장을 찾는다는 프레스우드 씨는 “지난주까지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속이 많이 상했다. 1차 TV토론에서 ‘사기꾼 힐러리’에게 밀리고 세금 문제가 나오고…. 이러다가 힐러리가 백악관 오벌오피스(대통령 집무실)에 앉는 꼴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역시 게임은 지금부터다”라며 웃었다. 옆에 있던 엘리엇 하딩 씨도 “트럼프가 펜스 하나는 정말 잘 뽑았더라. 트럼프가 펜스의 침착함만 배우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며 9일 열릴 2차 TV토론에 기대감을 보였다.
기자가 이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침묵하는 다수’라는 점이었다. 트럼프의 막말과 소수인종 비하 등으로 평소엔 트럼프 지지자라고 대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이날 유세 현장처럼 서로의 ‘정치적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는 평소 억눌렀던 정치적 열정을 폭발시킨다.
하딩 씨는 “트럼프가 1년 넘게 밀릴 것 같으면서도 계속 지지세를 이어온 것은 나 같은 숨은 지지자들 때문”이라며 “이제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으니 지지자들이 전면에 나서 클린턴에 대한 총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버지니아 트럼프 지지 모임 연합’은 8일부터 나흘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봉사자를 모아 가가호호 방문해 트럼프 지지를 호소하는 ‘노크 더 도어(Knock the door)’ 행사를 가지기로 했다. 알링턴에서 왔다는 앤드루 휴 씨는 “트럼프에 대해 아직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이웃들을 이해시켜야 한다. 생판 모르는 정치인들보다 우리 같은 이웃이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경합주 표심과 30일 지지율 평균치를 주목하라
7일 현재 클린턴은 전통의 민주당 강세 지역인 캘리포니아 뉴욕 등 동서부 주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반면 트럼프는 텍사스를 비롯해 보수 색채가 강한 중남부에서 강세다. 관건은 경합주의 향배다. 7월 양당 전당대회 이후 경합주 판세는 석 달 넘게 여론조사 기관과 조사 시점마다 달라지고 있어 지켜보는 사람조차 헷갈릴 정도다. 특히 두 후보가 사활을 걸고 있는 플로리다, 오하이오, 노스캐롤라이나 등은 선거일이 돼야 향배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야말로 초박빙의 승부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30일 동안의 지지율 평균치라고 미 정치분석 전문기관인 ‘538’이 지적했다. 선거 전날까지도 공화당 후보 밋 롬니가 우세를 보이는 전국 여론조사가 발표되는 등 대혼전이었던 2012년 선거가 대표적인 사례다.
선거 운동 마지막 30일(10월 7일∼11월 5일)의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 전국 여론조사 평균치 추세를 보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주 근소하지만 우세를 이어갔다. 30일간 롬니는 총 4일 동안만 평균치에서 오바마를 앞섰고 11월 들어선 1일 이후로 한 번도 앞서지 못했다. 투표 직전 RCP 평균치는 롬니가 48.1% 대 48.8%로 오바마에게 뒤졌다. 실제 선거에선 오바마가 51.1%, 롬니가 47.2%를 득표했다. 클린턴은 7월 28일 이후로 RCP 평균치에서 트럼프에게 뒤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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