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미국 대선 1차 TV토론에서 사회자인 NBC 앵커 레스터 홀트가 이같이 물었을 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70)는 기업 유치 방안을 제대로 소개하질 못했다. 그저 기업이 해외로 떠난 현실에 대해 “우리나라는 심각한 문제에 빠졌다”고 평가하더니 뜬금없이 중국을 비판하다가 이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 후보(69)를 비방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홀트가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며 논점을 벗어나 헤매는 트럼프를 말렸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아니나 다를까. 동아일보가 클린턴 후보와 트럼프 후보의 말 속 숨은 심리와 독특한 언어 습관을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데이터저널리즘랩 한규섭 교수팀에 의뢰해 심층 분석한 결과 이번 토론에서 트럼프의 ‘분석력 점수’는 100점 만점에 20.65점으로 낙제점이었다. 이는 클린턴(40.74점)의 절반에 해당한다.
한 교수팀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8월까지 공개된 연설문을 바탕으로 지난달 대선 1차 TV토론 속기록을 ‘심리학적 텍스트 분석 프로그램(LIWC·linguistic inquiry and word count)’으로 비교 분석했다. 말하는 사람의 심리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서 개발된 이 프로그램은 단어를 성격에 따라 분류해 말하는 사람의 분석력과 자신감, 진정성 및 분위기를 점수로 나타낸다. 후보들은 토론에서 시종일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진심만 호소하는 듯하지만 이 분석틀에 넣으면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정과 스타일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다. 트럼프는 급한 상황에서 분석력 떨어져
연구에 따르면 트럼프의 토론 분석력 점수는 7, 8월 발표한 연설의 분석력(76.86점)에 비해 턱없이 낮다. 올봄만 해도 ‘분석력 열등생’이었던 트럼프는 4∼6월 62.82 대 51.56으로 클린턴을 앞선 뒤 7, 8월에는 클린턴(48.34점)을 압도했다. 트럼프가 8월 선거대책본부장에 여론조사 전문가 켈리앤 콘웨이를 발탁한 효과를 봤다는 분석이 가능했다. 두서없이 연설하는 듯하지만 캠프의 새로운 브레인이 치밀하게 준비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토론에서의 분석력이 연설보다 현저하게 낮다는 것은 트럼프가 양자 대면에서 급박해지면 침착하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연설은 준비한 대로 읽으면 되지만 토론은 상대의 반박에 민첩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TV토론에서 후보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문장당 단어 수’는 14.68개 대 11.78개로, ‘6개 글자 이상인 단어 활용도’도 16.54 대 14.49로 클린턴이 트럼프보다 훨씬 많았다. 트럼프는 토론에서 해외에 진출한 기업의 귀환을 예상하며 “기업들이 올 것이다. 공장을 지을 것이다. 성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클린턴이라면 “기업들은 정부의 법인세 혜택을 받기 위해 국내로 돌아와서 공장을 짓고, 생산 시설을 확장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내용이다.
결과론적으로 클린턴이 더 지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트럼프가 쉽고 간명하게 설명한 셈이다. 한 교수는 “트럼프는 주된 지지층인 저학력 백인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쉬운 언어를 쓴다”라고 해석했다. 클린턴은 언어의 진정성 약해
토론에서 드러난 언어의 진정성 부문에서는 트럼프가 42 대 23.11로 클린턴을 이겼다. 클린턴은 토론에서 ‘e메일 스캔들’로 공격을 받자 “실수였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사과했다. 모범생 같은 모습이었지만 자초지종은 밝히지 않고 실수란 말만 반복해 논의의 진전을 막으려는 모양새가 됐다. 토론에서 유독 ‘글쎄’ ‘내 생각에는’이란 말로 공격에 답할 시간을 벌며 방어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반면 트럼프는 납세 회피 의혹에 대해 “원한다면 거래 은행 명단을 보여 주겠다”고 시원하게 답했다. 세금 명세를 밝히진 않았지만 소유한 빌딩이 39억 달러(약 4조3375억 원)라는 등 구체적 자산을 공개했다. 팩트 체크(fact check)에서 16번의 거짓말을 했다는 지적을 받은 트럼프가 진정성 점수에서 클린턴을 앞선 이유다.
클린턴 갈수록 공격적
보디랭귀지 분석에서도 클린턴은 진정성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리학자인 캐럴 킨제이 고먼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칼럼에서 “클린턴의 딱딱한 미소는 노련해 보일 수 있지만 거만하고 가식적인 느낌도 준다”고 밝혔다.
연설에 나타난 진정성 점수는 대선이 임박할수록 두 후보 모두 하락해 눈길을 끈다. 한 교수는 “두 후보 모두 유세 기간 동안 솔직한 생각보다 계산된 표현이나 공약을 반복하는 데 익숙해져 진정성이 낮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에서 클린턴이 연설 때보다 부정적 톤을 높인 점도 특징적이다. 클린턴은 토론 초반부터 “당신은 말도 안 되는(crazy) 말로 토론하고 있다”고 면박을 주며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세금 회피는 정말 끔찍한(terrible) 일”이라며 강한 표현도 자주 썼다. 박빙 국면에서는 긍정적 이미지가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 후보의 긍정주의가 당선 가능성을 높인다는 이론을 발표했던 마틴 셀리그먼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WP에 “클린턴이 트럼프보다 긍정적인 톤을 보이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대 이후 긍정주의는 (대선 예측에서) 더 이상 신뢰할 만한 요소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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