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노무현은 처음엔 군소 후보 축에 끼었다. 그가 이인제 대세론을 잠재우고 민주당 후보가 될 줄을, 그리고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 막판 단일화 끝에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노무현은 1946년생으로 동갑내기다.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180도 달라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적 배경과 인생철학 또한 천양지차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유사점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놀랍다. 한 달 앞둔 미국 대선 판이 14년 전 한국 대선과 흡사한 면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트럼프는 워싱턴포스트(WP) 뉴욕타임스(NYT) CNN 등과 일찌감치 전쟁을 선포했다. 메이저 언론은 트럼프가 대통령감이 아니라며 연일 공격하고 있다. NYT나 WP 사설은 트럼프 비난 일색이다. 자체적으로 트럼프검증팀을 꾸려 그의 구린 곳을 파헤치느라 총력전 태세다. 주류 언론과의 전쟁은 2002년 노무현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인터넷 언론에선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으로 노무현을 비유했다. 두 사람 다 주류 언론을 공격하면서 화제의 중심에 오른 과정부터 비슷하다.
노무현의 거침없는 말투와 옆집 아저씨 같은 언행도 트럼프와 빼닮았다. 점잖고 고상한 말 대신 초등학교만 나와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서민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똑같다. 노 후보 장인의 좌익 활동 경력을 문제 삼자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라고 받아친 것이나, 미국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글로벌 경험 부족을 꼬집자 “반미(反美)면 어떻습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반전을 만들어냈다. 트럼프가 연설에서 쓰는 언어는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다. 그럼에도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치겠다” “FTA(자유무역협정) 때문에 미국 사람들 일자리 다 빼앗겼다” “한국이 돈 더 안 내면 주한미군 철수한다”는 등 화끈한 직설법에 글로벌화로 궁핍해진 백인 서민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트럼프도 비호감에다 밉상이지만 사람들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더 염증을 느끼는 것 같다. 퍼스트레이디 8년에, 상원의원 8년, 4년의 국무장관, 대선 재수생 경력을 보면 신선미는 눈 씻어도 찾기 어렵다. 미국 서민들 중엔 “힐러리가 아직 대통령을 하지 않았느냐”며 농반진반(弄半眞半) 얘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노(老)정객 버니 샌더스에게 맹추격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모범생 힐러리’를 보면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선 재수를 했던 이회창이 생각난다는 사람이 많다. 평생 엘리트로 살아온 삶이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하와이와 인도네시아를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도 거친 섬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랐다.
노 후보의 지지율이 시들해지자 당에서 득달같이 후보를 사퇴하라고 달려든 것처럼 트럼프도 공화당 주류에서 홀대받는 신세다. 지난 주말 터져 나온 트럼프의 낯 뜨거운 음담패설(淫談悖說)에 공화당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하다. 그 전부터도 부시가(家)에서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고 공화당 싱크탱크에서도 일찌감치 트럼프 반대에 목청을 높였다. 자질론에 휩싸이는 바람에 동지가 적이 되는 참담한 현실을 두 사람 모두 맛봤다.
노무현은 시대정신으로 ‘사람 사는 세상’과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를 내걸었다. 트럼프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가 대선 슬로건이다. 2002년 한국 사회와 2016년 미국 사회에 잠재된 모순을 적확하게 꿰뚫은 어젠다였다. 반면 이회창과 클린턴의 구호가 무엇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트럼프에게는 있지만 힐러리에게 없는 것은 열정효과(Enthusiasm Effect)”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유세 현장은 사람들로 복작거려 미어터지고 축제장 분위기지만 클린턴 유세장엔 곳곳에 빈 곳이 많고 열기도 시들하다는 사실을 플로리다와 아이오와 유세장을 취재해 비교했다. 14년 전 노무현 유세가 꼭 그랬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노란 풍선을 들고 몰려들었고, 마치 토크쇼 축제장에 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딱딱하고 규격적인 이회창 유세장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유세장에 몰려드는 트럼프 열렬 지지층인 ‘트럼프 혁명군(Trump Revolutionary Army)’은 미국판 노사모 같다.
국제기사 에디터로서 올해 미국 대선을 보도하면서 트럼프 기사를 클린턴보다 훨씬 많이 채택한 것 같다. 트럼프는 막말이든 기행(奇行)이든 어쨌든 연일 기삿거리를 쏟아냈지만 클린턴 쪽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기사 균형을 맞추려 클린턴 기사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게 없어 늘 고민이었다. 엘리트 정치에 신물 난 필리핀 국민들은 다바오 시장 출신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온갖 험한 말을 내뿜었지만 ‘마약과의 전쟁’ 하나로 대통령으로 뽑았다. 사방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판을 뒤흔들어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표도 되는 세상이다. 트럼프가 반전의 드라마를 계속 쓸 수 있을지 끝까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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