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리는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현장에 가봐야 열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대통령이 5∼10분 브리핑한 뒤 이어지는 기자들과의 인정사정없는 일문일답 시간이 본게임이다. 대통령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딱 한 뒤 질문을 일절 안 받고 자리를 떠나는 일은 없다. 중대 현안일수록 회견 시간은 길어진다. 폭스뉴스 같은 보수 매체가 사사건건 대통령을 트집 잡는 것이 불쾌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나는 힘이 있는 대통령이니까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답변은 대국(大國)의 대통령답다. 1시간 이상 이어지는 기자회견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2012년 6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를 백악관에 초청해 전임 대통령 부부 초상화를 공개하고 벽에 거는 행사를 열었을 때다. 공화당인 부시가 “오늘 이렇게 부시 가문 14명을 초대해 먹여줘서(feeding) 감사하다”고 분위기를 돋우자,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여러 채널을 감상할 수 있는 프리미엄 스포츠TV 패키지를 (전임 대통령이) 남겨놓고 가서 고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행사장엔 폭소가 넘쳤다.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 예우하니 부시 대통령 부부가 지난달 말 워싱턴 내셔널 몰 스미스소니언의 국립흑인역사박물관 개관식에서 오바마 부부와 자리를 같이 하며 축하했을 것이다. 현직과 전직 대통령이 으르렁거리는 한국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오바마는 2011년 7월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하는 젊은 백악관 트위터 팔로어 170여 명을 백악관에 초대해 타운홀 미팅을 갖고 젊은이들과 국정 현안을 놓고 트위터 토론에 나섰다. 이후 그에겐 ‘SNS 대통령’이란 별명이 생겼다. 의회의 극한 대립으로 빚어진 정부 셧다운(폐쇄)을 막기 위해 여야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초청하고, 밤늦게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설득하며, 식당에서 한턱내겠다고 제안하는가 하면, 골프장에서 정적과 함께 라운딩하며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전속 사진사 피트 수자가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대통령의 10월 사진을 보면 대통령이 옆에 있는 듯 숨결이 느껴진다.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 연설을 위해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로 날아가는 에어포스 원(대통령 전용기)에서 대통령연설기록비서관 스티브 크루핀과 마주 앉아 연설문을 보고 고민하는 모습에 격식이라곤 찾기 어렵다. 10월 26일 대통령이 데니스 맥도너 비서실장 및 백악관 선임고문들과 함께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진지하게 회의하는 장면은 이 사람이 과연 임기를 70일 남겨놓은 대통령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달 초 대통령선거 조기 투표를 위해 투표장이 마련된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청에 들렀다가 줄 서 기다리는 흑인 여성에게 손을 뻗어 잡는 장면과 백악관에서 열린 ‘히스패닉 유산의 달’ 행사에 참석한 히스패닉 여성 록사나 기론이 오바마를 꼭 껴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선 대통령의 인간미가 물씬 묻어난다.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임기 말 오바마 지지율이 55%까지 솟구치는 것은 대통령의 장기 정책을 국민들이 마침내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백악관은 설명한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을 지낸 토미 비어터는 “오바마는 8년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그는 근본적으로 괜찮은(decent)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핵심 측근이 한 사람 있다. 밸러리 재럿(59)이란 여성으로, 그가 1991년 시카고 시장실 부비서실장일 때 미셸 오바마를 시장 보좌역으로 채용한 인연으로 만났다. 오바마는 2009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재럿을 백악관 선임고문에 임명하고 대통령집무실 바로 옆에 방을 줬다. 퇴근 후 가끔 재럿의 집에서 오바마 부부와 그가 함께 피자를 먹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막역한 사이다. 공식적으로 자리를 줬으니 비선 실세라는 뒷말이 나올 리 없다.
오바마가 대중과 공감하는 스킨십과 좁은 탁자에서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는 모습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다. 의회를 존중하고 전직 대통령도 국정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협치(協治)의 정신, 가식 없는 인간적인 면모에 국민들은 백악관을 떠난 오바마를 그리워할 것이다.
미국에선 대통령선거(11월 8일) 후 새 대통령 취임식 날인 내년 1월 20일까지를 의회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레임덕 시즌으로 부른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이번엔 민주당이 상원을 장악할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모든 것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마이티 덕(Mighty Duck·강력한 오리)’ 시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기를 1년 4개월이나 남겨둔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파문으로 영락없는 ‘절름발이 오리’ 신세다.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이 오바마와 일치하는 게 몇 개나 되는지 모르겠다. 은둔의 대통령,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과(後果)가 간단치 않다. 그나저나 우리는 언제 오바마 같은 대통령을 한 번 가져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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