訪中 나집 말레이시아 총리
39조원 경협-국방 MOU 체결… 필리핀 이어 ‘親中’ 노선에 합류
“美 아시아 재균형정책, 시험대 올라… 남중국해 영향력 축소 불가피”
필리핀에 이어 말레이시아도 ‘친(親)중국’ 노선으로 돌아섰다. 8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 정계가 어수선한 사이를 틈타 중국이 여기저기 돈 보따리를 풀면서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회원국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남중국해 패권을 놓고 중국과 다투는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일 로이터와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전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회담을 갖고 국방 철도 에너지 등 28개 분야의 협력 계획에 합의했다. 양국은 또 말레이시아 동부철도 건설 등 39조3000억 원 규모의 14개 투자협정도 맺었다. 남중국해에서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국방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해군 초계함 4척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가 중국산 무기를 대거 구입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말레이시아가 경제협력을 넘어 군사 분야에서도 중국과 손을 잡겠다는 뜻이다. 나집 총리는 “중국은 진정한 친구이며 양국 관계를 격상하기로 했다”고 말했고, 리 총리는 “말레이시아와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나집 총리는 방중에 앞서 “중국과의 관계가 최고조에 달했다”며 중국과의 밀월을 예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밀월 관계로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 필리핀이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집권 이후 친중반미 노선을 걷는 데다 미국과 관계가 좋았던 말레이시아마저 점차 중국 쪽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내내 밀어붙였던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 전략이 빛바랠 처지가 됐다.
그동안 아세안 10개 회원국 중 캄보디아와 라오스 정도가 친중 국가로 꼽혔지만 이제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까지 친중 대열에 합류하면서 아세안의 축이 중국으로 기울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도미노 현상과 같다. 필리핀이 중국에 넘어가자 말레이시아도 크게 흔들린 것”이라며 “중국은 다른 남중국해 국가들도 매수할 능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말레이시아가 중국으로 기운 것은 나집 총리가 미국과 껄끄러운 관계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집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하와이에서 골프를 치는 등 그동안 미국과 잘 지내왔다. 하지만 나집 총리가 올 7월 측근들과 함께 말레이시아 국부펀드 1MDB에서 횡령한 자금이 미국으로 유입됐고, 이를 미 법무부가 압류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나집 총리는 관련 의혹을 부인했지만 미 법무부는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제한적이며 장기간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싱가포르 난양공대 S 라자라트남 국제대학원의 양 라잘리 카심 선임연구원은 WP에 “남중국해에서 영향력이 커진 중국이 이 일대에서 이권과 권한을 휘두를 경우 결국 인근 국가들의 반발이 커질 것이며 그들은 다시 미국을 쳐다볼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중국해에서 기반을 다진 중국은 리 총리가 2∼9일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러시아 등 4개국 순방길에 올라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협력 강화와 함께 중앙아시아 영향력 확대에 나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