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스케치]634m 초고층건물 뒤엔… 술병 들고 이불 짊어진 노숙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5일 03시 00분


테레사 수녀도 찾았던 日도쿄 빈민가 ‘산야’ 가보니

일본 도쿄의 대표적인 빈민가 산야 지역에 출동한 경찰과 주위에 모여든 노숙인들(위 큰 사진). 이 지역 공원에는 노숙인들의 텐트가 10개 이상 모여 있다(왼쪽). 산야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법인 산유카이의 유이 가즈노리 이사가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공동 납골당 비석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도쿄의 대표적인 빈민가 산야 지역에 출동한 경찰과 주위에 모여든 노숙인들(위 큰 사진). 이 지역 공원에는 노숙인들의 텐트가 10개 이상 모여 있다(왼쪽). 산야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법인 산유카이의 유이 가즈노리 이사가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공동 납골당 비석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지난달 22일 오후 찾아간 일본 도쿄(東京) 다이토(臺東) 구 이로하카이 상가는 마치 폐허 같았다. 토요일 낮이었지만 쇼핑객들은 보이지 않았고 문을 연 상점은 열에 한둘뿐이었다. 대부분 상점들은 오래전에 폐업한 듯 간판에 먼지가 수북했다. 인적이 사라진 상가에선 노숙인들이 모여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기자를 이 지역으로 안내한 시민단체 산유카이(山友會) 소속 자원봉사자 핫토리 요시히로(服部芳弘·55) 씨는 “안전을 위해 카메라를 꺼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로 오랜 침체에 빠졌던 일본 경제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지만 도쿄의 대표적 빈민가 산야(山谷) 지역은 완전 딴판이었다. 버려진 땅이라 해도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산야는 도쿄 다이토 구와 아라카와(荒川) 구에 걸친 1.65km²의 변두리 지역을 말한다. 1960년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야라는 지명이 사라져 지금은 정식 행정구역 명칭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일본인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대표적인 빈민가다. ‘빈자(貧者)의 성녀’로 불리는 테레사 수녀(1910∼1997)가 1981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찾아간 곳이기도 하다.

 기자가 머물러 있던 상가 건너편에서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구급차와 경찰차가 보였고 경찰 서너 명이 머리를 염색한 젊은 남성을 연행했다. 폭행 사건이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노숙인들은 볼거리가 생겼다는 표정으로 이불과 옷가지 등을 주섬주섬 챙겨 모여들었다.

 인근 공원에는 노숙인 텐트가 10개 넘게 있었다. 일부는 슬레이트로 지붕까지 올린 모습이었다. 역시 노숙인 서너 명이 박스를 테이블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인근 도로에 누워 잠든 사람도 보였다. 옆에는 복지회관이 있었는데 노인 대여섯 명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남루한 차림이었다. 바로 옆쪽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파탑(634m) 스카이트리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634m 초고층 건물 뒤에 노숙인 텐트촌이 있는 아이러니한 풍경이었다.

일본의 대표 빈곤가 ‘산야’

 기자는 이날 산유카이가 주최하는 투어 행사에 참석해 산야 지역을 둘러봤다. 1984년 설립된 산유카이는 산야 지역에서 무료 클리닉과 급식소 등을 운영해 오고 있다. 이번 투어는 빈곤의 현실과 구조적 원인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기자와 일본인 5명이 참여했다.

 투어가 시작된 곳은 도쿄 도심 동북쪽 미나미센주(南千住) 역이었다. 역을 나서니 여느 주택가처럼 쇼핑센터가 있었다. 동행한 유이 가즈노리(油井和德·32) 산유카이 이사는 쇼핑센터 옆 도로를 가리키며 “에도 시대 처형장이 있던 장소로 ‘뼈길’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당시 3대 처형장 중 하나였던 고즈카바라 처형장에서 20만 명 이상이 참수됐다. 지금도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면 뼈가 나온다고 한다.

 산야 지역은 역사적으로 천민들의 거주지였다. 처형장에서 일하는 망나니 등이 살았고 근처에 에도 제일의 유곽 요시와라가 있었다. 전후 고도 성장기에는 동북 지방에서 온 일용직 노동자들이 ‘도야’라고 불리는 간이 숙박시설에서 거주했다. 기록에 따르면 1960년대에는 이 지역에 간이 숙소 220여 곳이 있었고 노동자 1만5000명이 거주했다. 간이 숙소에도 머물 돈이 없는 이들은 강가에 천막을 치고 노숙을 했다. 일용직 노동자가 많다 보니 술을 마시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켜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도 많았다. 이권을 두고 야쿠자들도 활개를 쳤는데 1980년대 이 지역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던 영화감독 2명이 살해되기도 했다.

‘노동자 거리’에서 ‘생활보호의 거리’로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대규모 토목공사가 자취를 감추면서 ‘노동자의 거리’였던 이곳은 ‘생활보호의 거리’가 됐다. 숙소가 저렴한 탓에 회사가 망해 거리에 나앉게 된 사람, 빚을 지고 도망친 사람, 이혼 후 갈 곳을 잃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지금은 130여 개의 쪽방에 3000여 명이 지내고 있는데 90%가량이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다. 유이 이사는 “대부분 독신 남성이고 가족과 절연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침대가 간신히 들어가는 쪽방에서 자고, 무료 급식소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쪽방의 숙박비는 하룻밤에 2000엔(약 2만2000원) 안팎이었고 하루에 1700엔(약 1만8500원)짜리도 있었다.

 노숙을 하다 지방자치단체나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간이 숙소에 자리 잡은 이들도 있다. 문제는 이들이 마음 둘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산유카이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하타 쓰토무(畑勳) 씨는 “노숙인이 줄었으니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혼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으며 우울증에 걸리거나 고독사 또는 자살로 생을 마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무연고 사망자 위한 공동 납골당 지어

 이 때문에 산유카이는 ‘누구도 외톨이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쪽방 거주자나 노숙인들이 교류하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여서 함께 취미로 인형을 만들거나, 영화를 보는 자리도 정기적으로 마련한다. 이날 사무실에서 투어 참가자들과 함께 인형을 만든 주민 스즈키(가명·66) 씨는 “인형을 만들 때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가 사망한 뒤 가족과 연을 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 해고당한 뒤 스미다 강가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 10여 년 전 지자체와 산유카이의 도움으로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산유카이는 간호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요양 시설도 운영 중이다. 질병, 장애 등으로 혼자 생활하기 힘든 이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고 생활하는 시설인데 24시간 직원이 상주하며 돌봐준다. 이곳에서 만난 하라타(가명·89) 씨는 시설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연금에 의존해 살아오다 치매 증세가 심해져 2년 전 아파트에서 쫓겨났고 산유카이의 소개로 이곳에 입소했다. 그는 다소 귀가 어두웠는데 큰 소리로 건강 상태를 묻자 “아직은 병원에 걸어 다닐 수 있다”며 웃었다.

 쪽방 거주자들은 가족과 절연한 경우가 많아 사망해도 가족 친지 등이 시신을 인수하지 않는다. 캐나다인 선교사 출신인 장 르보 산유카이(71) 대표가 공동 납골당을 생각한 것도 가족처럼 지내던 일용직 노동자가 사망한 경험이 바탕이 됐다. 그는 1년 후 무덤을 찾으러 갔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산유카이는 지난해 크라우드펀딩(인터넷으로 시민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을 통해 255만 엔(약 2800만 원)을 모아 무연고 노숙인을 위한 납골당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6명이 잠들어 있는데 르보 대표도 이곳에 잠들 예정이라고 했다. 핫토리 씨는 “노후 파탄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지금 산야에서 일어나는 일은 앞으로 일본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일”이라며 “빈곤 노령층이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 마음을 둘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아베노믹스#빈민가 산야#테레사 수녀#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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