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때리기’만 열올린 美진보 “밑바닥 민심 못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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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격랑, 흔들리는 세계질서/막오른 트럼프 시대]<4> 지식인-주류언론 뒤늦은 자성

 “미국 시민들이 ‘이런 자격 없는 후보(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할 것이라곤 생각을 못했다. 정말 끔찍한 날이다. 도시 외곽, 시골에 사는 많은 백인들의 미국에 대한 견해가 (나와)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논객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8일 대선에서 ‘자격이 없는 후보’가 당선하자 NYT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을 ‘몰랐던 나라’라고 표현했다.

 공영 라디오 방송 NPR는 12일 ‘NYT, 워싱턴포스트(WP), CNN 등 진보 주류 미디어와 크루그먼 같은 언론인들이 왜 성난 민심을 읽지 못했느냐’는 주제의 기획 프로그램에서 “트럼프만 비난하느라 ‘트럼프 현상’의 본질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출연자인 한 대학교수는 “힐러리 클린턴이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동부 경합 주에선 ‘4년 전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찍었지만 이번엔 트럼프를 찍겠다’는 유권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NYT 등은 그들에게 ‘왜’라고 묻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올해 내내 “진보 진영이 (클린턴 당선 축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고 있다. 소외돼온 백인 남성 노동자 등이 기성 체제의 상징인 워싱턴과 월가를 향해 던지는 ‘인간 화염병’이 바로 트럼프”라고 경고했지만 진보 엘리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진보 진영의 집단사고, 또는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메아리를 만들어 내는 방)’ 현상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주류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TV 연예계와 할리우드 영화계, 스포츠 등 대부분의 영역을 진보 이데올로기와 진보 인사들이 장악하면서 일반 민초(民草)들과의 소통은 꽉 막혀 있었다는 얘기다.

 소외된 미국 백인의 현실을 그린 책 ‘힐빌리 엘레지’의 저자 J D 밴스는 선거 직후 “진보 진영이 일종의 ‘거품(bubble)’ 속에 빠져 양극화된 미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명 경제학자들부터 TV쇼 진행자, 최고 인기 연예인들까지 트럼프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살면서 주위의 클린턴 지지자들만 만나다 보면 다른 사람들(트럼프 지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WP 칼럼니스트 마거릿 설리번도 9일 “주류 미디어 기자들은 고학력의 대도시 출신으로 진보 성향이어서 사실상 미국의 반쪽만을 보고 있었다”고 자성했다.

 선거는 진보 진영의 공고했던 ‘에코 체임버’를 사실상 깨뜨렸다. 기자가 만난 한 20대 여성 뉴요커는 “내가 딛고 있던 마룻바닥마저 내려앉은 느낌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미국 시민이 이렇게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백인 여성 변호사 메리 스키너 씨(56)도 “내 주위의 남성 오피니언 리더들 중 ‘트럼프 지지’를 밝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여성이어서 그들이 속마음을 숨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슬펐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로만 인식됐던 트럼프의 당선은 대학가의 젊은 진보 전사(戰士)들을 큰 충격에 몰아넣었다. 하버드대에선 선거 다음 날 예정됐던 시험이 미뤄졌고 학생들의 결석으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뉴욕주립대의 한 교수는 기자에게 “학생들의 심리 치료를 위한 학교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건의가 제기될 정도”라고 전했다.

 선거 직후부터 벌어진 주요 대도시의 ‘반(反)트럼프 시위’가 진정 기미 없이 나날이 확산되고 있고 인종 차별과 성 차별 범죄에 맞서기 위한 ‘옷핀 달기’ 운동까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선 “이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총체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 진보 주간지 ‘더 네이션’은 “앞으로 이런 식의 클린턴주의(Clintonism)로는 트럼프주의(Trumpism)를 이기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클린턴주의가 기성 제도권, 진보 기득권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트럼프주의는 유권자들의 소외감을 달래며 그들로부터 정치 변화에 대한 열정을 이끌어내는 풀뿌리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잡지는 “분노하는 풀뿌리 민심에 ‘극우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는 기름을 부은 트럼프주의에 맞서려면 버니 샌더스가 주창한 인간적인 사회민주주의 비전을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다시 말해 민주당의 후보 선택도 기성 인물인 클린턴이 아니라 신예인 샌더스였어야 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뉴욕=부형권 bookum90@donga.com /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 한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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