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권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실을 억압하고 나를 망각 속에 묻어둘 것임을 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저주하라.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역사가 나를 무죄라 하리라.”
한국이 전후(戰後) 혼란에 휩싸여 있던 1953년 9월. 중남미 쿠바의 법정에서는 27세 청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같이 외쳤다. 카스트로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뒤집기 위해 160여 명의 동지와 쿠바에서 규모가 두 번째로 큰 군사기지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법정에 붙잡혀 왔다. 변호사이던 그가 스스로를 변호하며 남긴 이 최후진술은 이후 쿠바 반(反)정부 운동의 선언문으로 남았다. 열렬히 독재에 항거했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에 ‘독재의 아이콘’이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
○ 반항아에서 혁명가로
카스트로는 1926년 8월 스페인에 맞서 쿠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농부 앙헬 카스트로 이 아르기스와 가정부였던 리나 루스 곤살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 때 가톨릭학교의 세례를 거부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반항아였던 카스트로는 법에 흥미를 갖고 아바나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달변가이면서 운동도 잘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우연히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게 된 그는 학생운동 배후자로 지목됐다. 사실 학생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정부의 탄압을 직접 받게 되자 저항 의식을 키우게 됐다.
학생운동에 더 깊이 빠져든 카스트로는 1953년 게릴라전으로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실패해 1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하지만 카스트로 수감에 분노한 민중이 거세게 항의하며 카스트로는 옥살이 2년 만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 경제개혁 단행, 미국과 핵전쟁 위기
자유의 몸이 된 카스트로는 1955년 멕시코로 망명해 혁명동지인 체 게바라를 만난다. 중남미 해방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게릴라 전술을 배우고 쿠바혁명을 일으킬 기회를 엿봤다. 멕시코에서 혁명세력을 모으던 카스트로는 1956년 11월 12인승 하얀색 요트 ‘그란마’에 동지 82명을 태우고 쿠바로 향했다. 정부군의 공격으로 동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생존자들끼리 똘똘 뭉쳐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거점으로 삼아 게릴라전을 벌였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카스트로 반군은 다음 해 1월 정부군에 첫 승리를 거뒀고 1958년 12월 마침내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주하며 혁명에 성공했다.
다음 해 총리에 취임한 카스트로는 2006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쿠바를 통치했다. 집권 첫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을 몰수하고 토지 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끊었고, 이듬해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을 들여오는 문제로 미국과 핵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치달았다.
카스트로 정부는 폐쇄적인 경제를 고수하지는 않았다. 1990년 초부터 외국인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고 외국인 투자가들이 직접 투자하도록 규제를 풀었다. 1992년부터는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을 개혁하고 영세 자영업을 지원했다. 정치적으로는 법을 개정해 종교적 차별을 금했고 직접선거·비밀선거를 확대했다. 이때 카스트로는 자신의 아들 디아스의 부패를 인정하고 그를 원자력위원회 집행위원장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카스트로의 개혁 작업 가운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정책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쿠바는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이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명연설가였다. 위기 때마다 유려한 연설로 민심을 다독였다. 1970년 5월 한 대중 연설에서는 “여러분이 내가 솔직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설탕 1000만 t 생산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어쩌면 이건 내게 있어서도 혁명 이래 최악의 경험인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정치생명이었던 ‘설탕 1000만 t 생산’이 실패하자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다.
○ 독재에 저항하던 카스트로, 독재자 평가
정치인으로서 그는 철저한 독재자였다. 2008년 2월 행정부 수반인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생인 라울에게 물려줄 때까지 그는 당과 군, 입법부와 행정부 등 모든 국가기관의 최고위직을 독차지했다.
카스트로는 혁명 이후 체제 반대 세력들을 총살하거나 투옥하면서 철권을 휘둘렀다. 쿠바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미국 유럽 등의 인권단체들은 “카스트로 정권이 정적 제거를 비롯해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 고문을 자행했다”며 “쿠바의 인권 침해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반체제 인사인 마르타 베아트리스 로케는 “카스트로를 3개의 E로 표현할 수 있는데 병적 자기중심적(Egomaniacal)·독선적(Egotistical)·이기적(Egocentric)인 인물”이라며 “그를 독재자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고 여성 3명과의 사이에서 9명의 자식을 뒀다. 비밀스러운 불륜을 저질렀고 자식이 더 많다는 소문도 있다. 카스트로는 1992년 “사생활은 홍보나 정치를 위한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사생활 보호를 강조했다.
○ 화해의 ‘포스트 카스트로’ 시대
카스트로는 2008년 공식적인 권좌에서 물러난 뒤로도 언론에 칼럼을 쓰고 트위터로 국민과 소통하며 다른 남미 국가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녹색 군복을 즐겨 입었던 그는 올 들어 유독 독일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 체육복을 입어 눈길을 끌었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체육복을 입었다. 그가 아디다스를 아끼는 이유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디다스가 쿠바 국가대표팀을 후원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미국과 쿠바는 2014년 12월 53년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2015년 8월 아바나 주재 미국대사관이 생겼고 올해 2월 두 나라를 오가는 정기 항공 노선이 다시 뚫렸다. 올 3월에는 쿠바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의 정상회담이 88년 만에 열렸다. 역사의 변화를 지켜보던 그는 90세 생일이던 올해 8월 “우리에게 제국은 필요 없다”며 미국을 여전히 경계했다.
카스트로는 올 4월 아바나에서 열린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 폐회식에 수척해진 모습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나는 곧 아흔 살이 된다. 곧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 것이며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는 발언은 사실상 고별사가 됐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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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07:37:14
이 두기자들은 공산주의자인가? 김일성과 같은과이거능 왜 띄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