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5시경(현지 시간)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극우 성향의 자유당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본부는 환호했다.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과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국가주의와 반(反)유럽, 후진적인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대한 완벽한 승리”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밤 11시 이탈리아 개헌안 국민투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이들의 얼굴은 잿빛이 됐다. 친EU 성향의 마테오 렌치 총리가 직을 걸고 추진했던 개헌 승부수가 포퓰리즘 세력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EU 회원국 중 경제 규모 3위인 이탈리아는 영국과 미국에 이어 포퓰리즘 도미노의 세 번째 희생양이 됐다. ○ 포퓰리즘 벽 못 넘은 이탈리아 최연소 총리
2014년 2월 중도 좌파 성향의 민주당 소속 렌치 총리는 39세에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 총리에 올랐다. 그는 노동 교육 사법 개혁안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로타마토레(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때마다 상원과 하원에 동등한 권한을 배분한 양원제가 발목을 잡았다. 렌치 총리는 2014년 4월 상원 의원 수를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선출 방식도 직접투표에서 각 지역의회와 시장이 추천하도록 바꾸는 내용의 개헌을 제안했다. 정치 체계를 간소화해 2차대전 후 70년 동안 63개 정부가 들어섰던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해소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야당의 정치 공세로 의회 비효율 문제보다는 고착화된 취업난(청년실업률 37%)과 1997년 수준에 머문 국민소득(1인당 3만3000달러) 등 렌치 정부의 경제 실정이 부각됐다. 여당에서도 행정부의 힘이 강해지는 개헌안을 보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악몽을 떠올리는 이들이 나왔다. 그는 6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에 정치생명을 걸었다가 물러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와 같은 신세가 됐다.
렌치가 사퇴함에 따라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이 임명하는 새 총리가 잔여 임기 14개월을 채우게 되지만 내년에 조기 총선을 실시할 가능성이 높다. 제1야당 ‘오성(五星)운동’과 집권 민주당이 지지율 1, 2위를 다투고 있고 극우당 ‘북부동맹’이 3위다. 오성운동과 북부동맹은 모두 EU 탈퇴를 주장한다. 오성운동의 공약대로 EU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할 경우 이텍시트(Itexit·이탈리아의 EU 탈퇴)가 현실이 될 수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직은 유로존 탈퇴 지지율이 15% 안팎이다. ○ 포퓰리즘 도미노, 커지는 유럽 리스크
유럽 극우 정당 지도자들은 호재를 만났다. 북부동맹 살비니 대표는 “트럼프 만세, 푸틴 만세, 르펜 만세, 북부동맹 만세”라는 글을 올렸다. 내년에 실시되는 네덜란드(3월) 프랑스(4월) 독일(9월)의 총선과 대선에서도 포퓰리즘 정당이 힘을 얻게 됐다. 프랑스 대선은 제1야당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와 극우당인 국민전선(FN) 마린 르펜 대표의 양자 대결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4일 대선에서 극우 자유당 소속 대통령의 당선을 막아 낸 오스트리아도 2018년 9월 총선에서는 자유당의 집권이 유력하다.
경제적인 후폭풍도 거세게 불어닥칠 것으로 전망된다. 6월 브렉시트에 이은 이탈리아의 EU 이탈은 유럽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악재가 될 수 있다. 당장 이텍시트보다 심각한 문제가 이탈리아 은행의 부실이다. 이탈리아 은행의 부실 여신(2015년 말)은 18%에 이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은행의 부실 여신 5%에 비하면 부실의 골이 아주 깊다. 3600억 유로(약 450조 원)에 이르는 부실 채권 규모는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한다.
금융시장에선 렌치 총리가 사퇴한 후 부실 은행을 살리기 위한 자본 확충 등의 작업이 지연되거나 무산돼 은행 도산과 금융 시스템 위기로 이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우려한다. 은행 부실 문제가 본격화되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벌어질 경우 유로존 은행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대 8개 이탈리아 은행이 도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대위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이탈리아 은행이 자본 확충에 실패하고 부실이 심화되면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은행권도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8일 개최되는 유럽중앙은행(ECB)에서 양적완화 연장과 이탈리아 국채 매입을 늘릴 경우 시장 불안은 완화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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