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상 최초로 젊은 여성이 공주로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여왕으로서 내려왔다.” 영국의 전설적 사냥꾼이자 저술가인 짐 코빗이 케냐의 한 국립공원에 있는 트리톱스 호텔의 일지에 남긴 글이다. 사파리 관광객들이 야생동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실제로 나무들 위에 지은 이 숙소에 1952년 2월 5일 20대 여성이 투숙했다가 밤새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다음 날인 6일 졸지에 후계자가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조지 6세(말더듬는 왕을 소재로 한 영화 ‘킹스 스피치’의 실제 주인공)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 나흘 전, 한국에선 장차 ‘공주’로 세간에서 불리게 되는 아기가 태어났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61년 뒤인 2013년 11월 5일 런던 버킹엄궁에서 만난다. 이날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영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이끈, 박 대통령이 평소 롤 모델이라고 했던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로열패밀리’도 오리지널은 다르다. 엘리자베스 2세는 공주 시절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친을 설득해 영국 여군부대에 자원입대했다. 보급차량 운행 임무를 맡아 트럭 바퀴를 교체하고, 흙바닥에서 차량을 정비하며 또래들과 함께 복무했다. 1992년 윈저 성 화재 복구에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되는 데 비판 여론이 일자 왕실의 면세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했다. 즉위 60주년인 2012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영국의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꼽힌 배경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아들인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이혼 등 사적으론 힘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93세를 앞둔 나이와 상관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어쩌면 임기를 다 못 채울지도 모를 박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1세가 아니라 2세만 제대로 본받았어도 좋았을 뻔했다. 공주처럼 권좌에 오른 박 대통령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려올 것인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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