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살면 애국자 된다더니, 아프리카에 위치한 중동 빈국(貧國) 이집트에 살다보면 한국에선 당연하게 여겼던 숱한 것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지는 계기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스포츠를 즐길 권리다. 이집트는 올해 가봉에서 열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7년 만에 결승에 올랐지만 정작 국민 대다수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보지 못한다. 대회의 아랍 중계권은 1인당 국민총생산(GDP) 6만 달러(6900만 원)로 세계 6위인 부국(富國) 카타르 위성방송사가 갖고 있는데, 가난한 이집트의 지상파 방송국이 중계권을 못 샀기 때문이다.
●유료채널 못 봐 2000원 내고 까페 집단관람
이집트는 1957년 첫 아프리카 네이션스컵부터 7차례 우승을 거머쥔 아프리카의 축구맹주라 한국 못지않게 축구 열기가 뜨겁다. 2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에서 이집트 축구대표팀은 2006~2010년 대회 3연패를 이뤄내며 최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이후 국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3연속 예선 탈락했다.
7년 만에 다시 밟은 이번 결승무대에는 상처 받은 전통강호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전 국민적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이집트 정부는 결승에 진출한 선수단 전원에게 1인당 10만 이집트파운드(620만 원)를 지급하며 우승할 경우 더 큰 포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집트 총리는 직접 결승 현장인 가봉으로 응원을 갔다.
아프리카의 맹주를 가리는 이 대회를 이집트에서 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매달 1000이집트파운드(6만2000원)를 내고 카타르 위성방송 유료채널을 신청해 집에서 보거나, 경기 때마다 동네 카페나 식당 등에 관람료 명목으로 30이집트파운드(1860원) 가량을 따로 내고 들어가 대형스크린으로 시청해야 한다. 모처럼 대목을 맞은 일부 카페와 식당 등이 가격을 2, 3배씩 부풀리는 건 애교로 봐줘야 한다.
기자의 집에선 위성방송 유료 채널이 안 나온다. ‘특파원 나왔으니 이집트판 붉은 악마를 느껴보자!’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경기가 열린 5일 밤 이집션(이집트 사람들) 지인들과 카이로 시내 헬리오폴리스의 한 카페로 향했다. 경기 시작 시간인 오후 9시보다 1시간 일찍 왔는데도 카페엔 250여명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입장료 30이집트파운드를 내고 음료를 따로 시켜야했지만 자리가 부족해 의자 1개에 2명이 나눠 걸터앉을 정도였다.
이슬람국가인 이집트에선 술을 마시지 않아 경기를 보러 온 가족, 부부, 친구들은 맥주 대신 콜라를 손에 쥐고 스크린을 바라봤다. 펩시 콜라캔에는 이집트 국가대표 유니폼 디자인에 축구선수 등번호와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이번 대회를 맞아 콜라업체에서 특별판을 만든 듯 했다. 이집트는 술엔 엄격하지만 담배엔 관대하다. 남녀 가리지 않고 물담배인 시샤를 피우느라 카페 내부는 뽀얀 연기로 가득했다.
●산산조각 난 피라미드의 왕좌 복귀
오후 9시 정각에 경기가 시작되자 정면의 대형스크린과 측면의 TV 2대에 시선이 쏠렸다. 결승 상대인 카메룬과의 상대전적에서 5승 2무 1패로 앞선지라 우승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다. 이집트 국기와 아프리카 악기인 부부젤라를 들고 응원 온 무함마드 메드하트 씨(35)는 점수 예측을 묻자 “몇 대 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무조건 이긴다”며 한껏 들떠있었다.
이집트는 월드컵에 2번 밖에 나가지 못했지만 피파 랭킹은 35위로 한국(37위)보다 높고,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제법 많다. 전반 22분 이탈리아 세리에A AS로마에서 뛰는 미드필더 무함마드 살라(25)의 패스를 받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소속 무함마드 엘네니(25)가 첫 골을 성공시키자 카페 전체가 함성과 부부젤라 굉음으로 뒤덮였다.
유럽 빅리그 슈퍼스타 못지않게 국민적 관심을 받는 선수는 44세의 노장 투혼을 불사르는 골키퍼 에삼 하다리다. 그는 199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 멤버인데 2006, 2008, 2010년에도 주전을 뛰었고, 이번 대회에선 3순위 후보 골키퍼로 선발됐는데 앞선 두 골키퍼가 모두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다시 주전으로 무대에 섰다. 4강 부르키나파소전까지 딱 1골만 내주는 철벽수비에다 4강전 승부차기에서 선방으로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이번 결승에서도 하늘색 유니폼에 빨간 장갑과 신발을 신고 선발 출전했다.
하지만 7년 만에 왕좌 복귀를 노린 피라미드의 꿈은 후반전 들어 산산조각이 났다. 이집트는 후반 14분에 이어 후반 43분에 잇따라 카메룬에 골문을 내주며 결국 1-2로 패했다. 골이 터질 때마다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하던 이들은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썰물처럼 카페를 빠져나갔다. 메드하트 씨는 “다른 아랍국가들이 우리의 패배를 한껏 기뻐할 걸 생각하니 더욱 분하다”며 이를 악물었다.
●축구장 직접 관람 못하는 이집트
패배의 분노는 도로 점거로 이어졌다. 한적했던 도로는 순식간에 인파로 가득 차 차량 통행이 불가능해졌다. 우승을 대비해 준비해온 폭죽을 분풀이 삼아 연신 터뜨려대는 바람에 카이로 전체가 폭발음에 휩싸였다. 거리 차량들도 ‘빠빠 빠빠빠~’ 박자에 맞춰 경음기를 울리며 분한 감정을 표출했다.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에서 이번 결승전을 앞두고 교민들에게 외출 자제를 당부하는 안전 공지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이로 시민 아흐메드 사리프 씨(35)는 “만약 우리가 우승했다면 이보다 훨씬 요란스럽게 도로를 막아 집에 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집트는 한국의 붉은 악마만큼이나 축구 열기가 뜨겁지만 정작 자국 리그 경기는 축구장에서 직접 관람할 수 없다. 모든 경기는 관중 없이 치러지고, 국민은 TV 중계로만 경기를 봐야 한다. 축구 사랑이 워낙 뜨겁다보니 경기장에서 대형 인명사고가 잇따라 정부가 내린 특단의 조치다.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도시 포트사이드의 축구장에선 2012년 2월 홈팀의 승리로 경기가 끝난 직후 홈팀과 원정팀 관중끼리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며 무력 충돌을 벌여 70명 넘게 사망하는 사고가 터졌다. 이후 정부는 주동자 11명을 사형시키고 축구장에 관중 입장을 금지시켰다. 사고 3년 만인 2015년 2월 카이로 에어디펜스 스타디움에서 처음으로 경기 관람을 재개시켰다가 입장권 없이 축구장에 들어가려던 시민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의 무력충돌로 또 다시 30명 넘게 숨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무관중 경기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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