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이슬람권 7개국 입국 금지…. 멕시코 대통령에겐 “미군을 내려보내겠다”고 위협하고, 호주 총리와는 통화하다 전화를 뚝 끊어 버리고, 연방지법 판사에겐 “소위 판사라는 자가 가소롭다”고까지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언동에 세계가 어수선하다. 취임 3주 만에 벌써 탄핵 얘기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94세 현자’ 총기 흐려졌나?
이런 트럼프를 두고 헨리 키신저는 지난해 말 “역사에 매우 주목할 만한 대통령(a very considerable president)으로 남을 수 있다”고 상찬했다. 1970년대 데탕트(긴장 완화)와 중국 개방, 중동 셔틀외교의 설계자로서 이제 구순을 훌쩍 넘어 ‘외교의 현자’로 불리는 키신저의 말이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키신저가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직 통일부 장관이 몇 년 전 “총기가 흐려진 키신저의 말을 이제라도 가려서 듣자”고 일갈해 논란이 일었는데,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하긴 키신저에겐 늘 아첨꾼(flatterer) 따리꾼(courtier)이란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꼭 칭찬이었을까. 키신저의 발언은 이렇다. “트럼프가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많이 던지고 있다. 그런 질문들에서 놀랍고 새로운 게 많이 나올 것이다. 외국에는 충격이자 동시에 엄청난 기회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하나의 현상이다.” 트럼프에 대한 평가를 가급적 유보하면서 그의 잠재적 가능성을 내다본 ‘현답(賢答)’ 아니었나 싶다.
키신저가 주목한 트럼프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그 답은 키신저의 국제정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키신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힘의 균형을 통해 지정학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세력균형론의 신봉자다. 세력균형론은 두 경쟁국이 있을 때 좀 더 약한 나라와 연합해 더 강한 나라를 굴복시키는 전략이다. 아울러 키신저는 강대국 지도자의 경세술(statecraft)을 중시한다. 국내 정치나 관료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 외교를 해내는 지도력을 높이 샀다.
그래서 키신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양면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키신저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현실주의 경세술의 왕자 ‘키신저 박사’와 비도덕적이고 권력에 굶주려 자기과시에 열중하는 비밀스러운 모사꾼 ‘헨리 씨’의 이중성은 늘 그의 이력을 평가하는 데 구름을 드리운다.”
키신저로선 온갖 논란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승부사 트럼프에게서 미국 주도로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 아닐까. 트럼프 내각엔 이미 키신저의 입김이 스며 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각각 바이오벤처기업과 워싱턴 싱크탱크의 이사로 키신저와 함께 일한 이들이다.
키신저의 책략 ‘트럼푸틴’
머지않아 키신저의 책략은 ‘반중·친러’로 구체화될 수 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 키신저. 그때 벌써 그는 “언젠가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언했다. 거침없이 굴기하는 중국을 꺾기 위한 ‘트럼푸틴(트럼프+푸틴) 브로맨스’가 세계를 어디로 이끌지 자못 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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